My Life/2011년

2011년 차강사르 넷째날 - 다르항기술대학교 총장 체블(Цэвэл) 집 방문

우라질레이터 2011. 2. 6. 16:52
차강사르 넷째날..
오늘 우리학교 총장 체블(Цэвэл) 집에 갔다.

이미 방문 약속은 하였었지만,
시간을 정확하게 정하지를 않아서,
그저께 오후에 문자로 오후 2시쯤에 가도 되냐고 문자를 보냈었다.

곧바로 문자 답신이 왔었다.
"7 dahi udur nyam garigt 11 tsagaas ireerei."

나는 이 문자를 일요일 11시부터 아무때나 오라는 뜻으로 이해했고,
명선이랑 인애랑
또 어느정도 우리끼리도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통역을 해줄 바트자르갈 선생님에게도 일요일 낮 12시에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오늘 아침... 11시 30분에 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다리고 있는데 왜 안오냐고...
엥???
11시부터 아무때나 괜찮은걸로 생각해서 12시에 갈거라고 했다.

내 어리버리한 몽골어 실력과 답신 메시지를 보내면서
12시에 가겠다고 시간을 명확하게 적지 않았던게 실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밤에
혹시 총장이 오늘 아침 11시부터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몽골어에서의 접미사 "~аас"..
이 뜻은 "~부터,~에서"이지만,
시간에 쓰일때 "~부터(와 있으라)"는 뜻, 즉, 11시에 오라는 말이라는걸 알게되었다.

11 tsagт ireerei. 11시 정각에 오라..
11 tsagaas ireerei .. 11시에 오라..
아마 이정도의 약간의 뉘앙스가 다른 정도랄까...

내 몽골어 실력이 부족하여,
어이없게 약속을 한시간이나 내 마음대로 늦춰버린 셈이 되었다.

명선이는 갑자기 울란에 볼일이 있어서 함께 가지 못했고,
인애랑 바트자르갈 선생님이랑
서비스센터(үйлчилгээ төв) 건물 앞에서 함께 만나서 같이 갔다.

총장집에 도착시간 12:20분...  
21동 아파트 2층.

근데..
가운데 1인용 쇼파(상석자리)에 앉아있는 저 분은..
우리학교에서 가끔 난닝구 입고 돌아다니는 그 아저씨다..
저 분이 왜 여기에 앉아있지???

총장이 옆 자리의 작은 의자에 스스로 앉는걸 보면,
총장보다 더 높으신 분??

그렇다면 혹시 총장의 아버지?
아버지 치고는 또 너무 젊다..
그럼, 혹시 총장의 오빠?
오빠라면, 이 명절날 자기 가족과 함께 안지내고,
여동생 집에 와서 떡하니 상석을 차지하고 있을리는 없을 것이다.

누구지? 누굴까? 총장과 어떤 관계일까?
설마 남편은 아니겠지???

- 내 카메라로 찍은 사진.ㅠㅠ..

- 인애 카메라로 찍은 사진... 인애 귀국할 때 카메라 나한테 팔라고 할까??

궁금하면 바로 뚫는다...^^
내 어리버리한 몽골어 실력때문에 큰 실수를 하더라도 그냥 웃음으로 넘길 수 있을 때 많이 묻자!

(1) "혹시.. 이분은 총장의 남편인가요?"
"티~~"
으음... 몰랐다.. 학교에서 난닝구 입고 돌아다니던 그 아저씨가 총장의 남편이라니..쩝..

(2) "몇살이세요?"
"남편은 토끼띠(60살.환갑이다). 총장은 53살"
2년후에 총장이 55살이 되면 그때부터 연금이 나온다고한다.
더 일하고 싶다면 여자는 60살, 남자는 65살(?)까지 일할 수 있다고 한다.

(3) "자식들은..?"
"아들이 둘 있다. 큰 아들은 30살. 미국에 있고,
 작은 아들은 28살이고 졸업해서 울란바타르에 있다"

(4) "그럼... 저 부엌에 있는 (무진장하게 이쁜) 저 아가씨는 누구인가요?"
"동생의 딸인데, 오늘 부엌일을 해야해서 도와주러 왔다"

(5) "당신은 어디에서 태어났나요?"
"나(총장)은 우문고비에서 태어났고,
 남편은 바잉골에서 태어났다"

(6) "내일 큰 아들 만나러 미국가신다는데, 대한민국 서울을 거쳐서 가나요?"
"그렇다. 서울을 거쳐서 세인트루이스에 간다"
참고로 몽골에서 외국으로 가는 직항항공 노선은 한국, 중국, 러시아, 독일 뿐이다..

(7) "한국에 가본적 있나요?"
"5년전에 미국에 가려고 서울에 경유하려고 들렸다가,
 남편의 비자문제로 함께 서울에서 5일동안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서울 지하철타고 서울타워등 서울을 많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지막날에는 예전에 우리학교에 근무했던 코이카 단원 2명과 연락되서,
 함께 서울의 식당만 많이 돌아아다녔다"

(8) "차강사르때에 뭐하고 지내고 계신가요?"
"보쯔 만들었다. 1,000개."

(9) "총장은 현재 채식주의자라고 했는데, 언제부터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나요?"
"5년전에 관절이 안좋아서, 채식을 하게되면서 관절이 좋아졌다.그때부터 채식을 하고 있다"

(10) "우리학교가 몽골 북부지역(다르항, 셀렝게, 훕스골, 볼강, 어르헝) 아이막에 있는
      대학교중에서 가장 큰 대학교가 맞나?"
    "그렇다"
     이 질문은 내 현장지원사업의 승인을 받기위한 기초정보로써 필요한 질문이었다.
     몽골 북부지역에서 가장 큰 대학교인데,
     컴퓨터공학과 실습실 PC가 "펜티엄"급이라는 현실에 대해서 
     개선을 위한 강력한 호소를 위한 근거가 필요했다.

오늘도 보쯔를 15개쯤 먹었고,
보드카 대여섯잔과 샐러드 한접시가 뱃속에서 섞이고 있었다.

초콜렛 한줌과 핸드폰 지갑을 선물로 받고 돌아왔다.

몽골에 와서 첫 차강사르의 마지막날을 이렇게 보냈다.

한국에 있을때에는 거의 십여년동안 
동생이 엄마와 조카들을 데리고 다니며 친척집을 방문하는 동안,
나까지 설쳐대면 복잡하다는 나름대로의 핑계를 대며,
나는 항상 명절동안 기름진 음식과 늘어지는 낮잠과 밤잠으로 연휴를 보내곤 했었다.

그런데, 몽골에 와서는..
처음맞는 차강사르라는 흥미로움도 있었지만,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집에
방문하고 초대받는게 무슨 자랑거리인거마냥 인사하러 다니고 있으니..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포함해서, 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형님들 모두에게
무지무지 죄송스럽다.

이번 기회에 분명하게 정신 똑바로 차린것이 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거든, 독거총각의 명찰을 여전히 달고 있을지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찾아뵙겠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