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수천명의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중의 한명이었던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고 생각이므로,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전체 또는 대다수와의 일치된 의견이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으며,
단원 파견기관인 KOICA(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파견정책이나 입장과도 무관합니다.
2013.3.18
황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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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코이카 해외봉사의 일반봉사단원으로 지원하게 된 계기는?
어릴 적부터 나보다 어렵고 힘든 환경에 있는, 약간의 희망과 꿈을 나눠주면 크게 성장할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릴 적(지금으로부터 꼭 20년전 중학교 때)에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 용어로 기초수급대상자였습니다.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써야했는데, 안경살 돈도 없었고, 집엔 쌀도 자주 떨어져서 주로 밀가루로 수제비랑 칼국수 해먹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국제단체(국제로타리클럽)로부터 2년동안 30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받은 장학금은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었고, 성실하게 살며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큰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 때 어머니와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언젠가 좀 잘 살게 되면 사회에 갚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단체(국제로타리클럽 성남지부)와 중학교 모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저에게 장학금을 주었던 단체에는 예전과 달리 장학기금이 넉넉해서 제가 되돌려 갚았던 장학금은 장학기금 재원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중학교 모교에서에는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로 중학생의 학비가 거의 들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받았던 내 마음의 빚을 사회로 돌려주는 것은 크게 의미없구나라고 생각하며 잊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모집광고를 보았었는데, 컴퓨터 분야에서 저의 사회생활의 지식과 경험을 어떻게든 나눠줄 수 있을 거라는, 그래서, 그 것을 통해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문제와 주택담보대출 처리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 없어서, 또 몇 년을 까맣게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에서 퇴사를 하고 2년여간 컴퓨터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다시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의 모집공고를 접하게 되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Q2. 어떤 지역에서 주로 무슨 일을 하셨나요?
2010년 2월 말에 몽골에 파견되었습니다. 2개월동안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현지어와 현지 문화 등에 대한 교육과 경험을 한 후에 실제 파견 근무지인 “다르항“이라는 도시로 파견되었습니다. 다르항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북쪽으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인구 10만 정도의 도시입니다. 몽골은 한반도 면적의 5배, 남한 면적의 15배가 넘는 넓은 국토를 가진 넓은 나라이지만, 전체 인구가 300만명 안팎의 국가라서 인구 10만의 다르항은 몽골에서는 2~3번째 큰 도시입니다.
그 다르항이라는 도시에 있는 다르항기술대학교의 컴퓨터공학과에 컴퓨터분야 단원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다르항기술대학교는 몽골 국립과학기술대학교의 전국에 흩어져 있는 10여개의 분교와 단과대학들 중의 한곳입니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써 파견기관을 위해 가장 큰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한 현장지원사업을 통해 “다르항기술대학교 컴퓨터종합교육센터”라고 간판을 붙인 컴퓨터교육 실습실을 만든 일입니다. 컴퓨터 교육을 위한 실습 장비는 대부분 높은 수준의 사양을 요구하는 컴퓨터가 필요한데, 그래서, 코이카의 무상원조지원금을 받아 현장지원사업을 통해 최신 컴퓨터 20여대와 빔프로젝터를 갖추었고, 컴퓨터 실습실 주변에서는 무선인터넷이 가능하도록 구축하였습니다.
또, 교육기관으로의 파견이다보니, 몽골 파견 후 6개월쯤 되었을 때,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컴퓨터공학과의 전공 선택 과목인 “무선 모바일 프로그래밍” 수업을 전담하며, 이론 수업과 실습 수업을 포함해서, 쪽지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 성적처리까지 모두 내 책임 하에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파견기간중의 학기 동안은 다른 현지 선생님의 담당 과목 중 “데이타 베이스”라는 컴퓨터공학과 전공수업의 실습수업을 맡아서 하였습니다.
Q3. 활동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내 어릴 적 기억을 보더라도 장학금이라는 또 장학생이라는 단어는 장학금을 받는 학생을 스스로 대견함을 갖게 하게 하고 더욱 성실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마련한 장학금을 포함해서, 고등학교 동기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또 해외봉사단원연합회(KOVA)의 지원과 도움으로 2년동안 21명에게 300만원정도의 장학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장학금을 전달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몽골을 위해 또 이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해달라며 당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중에는 몽골에서 이 세상을 위해서 분명 큰 사람이 될 사람이 나오게 될거라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흐믓해집니다.
현지 파견 후 단원 활동을 시작할 무렵 어느 선배단원으로부터 들었던 단원활동중 가장 힘든 점은 “갈등”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단원 기간 중에 신체적으로 견뎌내지 못할 만큼 큰 병치레를 하지는 않았지만, 현지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나와의 갈등은 2년간의 단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까지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큰 원인이었던 같습니다.
파견기관으로 출퇴근을 제멋대로 하는 일부 단원들과 현지인들의 생활이나 습관, 문화을 낮게 폄하하는 일부 단원들의 행동을 볼 때마다, 그런 단원들은 곧바로 귀국시켜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괜한 스트레스까지 받곤 했었습니다.
단원 활동의 원활한 지원을 한다기 보다는 원리원칙을 고집하며 단원 활동의 권위적인 통제를 앞세우며 형식적인 관리에 치우쳐진 코이카 현지 사무소 관리직원들의 업무처리 방식과의 갈등 때문에, 현지 사무소를 향해서는, 내 입을 다물고 내 행동을 감추어 버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행인지 아쉬워야 할지, 내가 파견된 기관에서는 원조개발 협력을 위해 파견된 코이카 단원에게 크게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내 파견기관의 기관장인 대학 총장에서부터 파견된 컴퓨터공학과의 선생님들이나 조교들과의 갈등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함께 생활하는데 큰 갈등이나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Q4. 코이카 해외봉사단은 요구하는 자격증 외에도 어학 능력이 뛰어나야만 될 수 있나요? 또 코이카 해외봉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본인만의 준비 방법이 있었다면 소개해주세요.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 되기 위해 자격증이나 어학 능력이 뛰어나야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었던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각 파견분야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학력과 경력만 있다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에 재학중인 코이카 해외봉사단원들도 꽤 많이 지원해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각 나라별 각 파견기관별 모집공고와는 달리 반드시 그에 맞는 사회경력 조차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는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지원 자격을 갖추기 위한 준비와는 상관없이, 지원했던 파견분야(컴퓨터분야)에서, 이미 10년 이상 근무해오고 있었고, 관련분야 자격증이 있었고, 관련분야 대학원을 졸업했기 때문에, 우연히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의 계획을 준비할 때,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 되기 위한 자격조건을 갖추려고 별도의 준비는 하지는 않았습니다.
Q5. 코이카 해외봉사단이 되기 위해 ‘이것만은 꼭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남을 위하는 마음가짐”입니다. 2년 동안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생활하면서 느꼈던 것 중에 “남을 위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하게 하는 단원을 여러 명 보았기 때문에 이런 마음가짐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어렵고 낯선 환경에서도 굳건히 적응해내겠다는 도전하는 마음가짐과 각오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지인들의 일상적인 음식들은 절대로 먹지 않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단원들도 보았고, 현지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현지어(몽골어)를 귀국 후에는 필요없으니, 현지어 공부는 할 필요 없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단원들도 보았습니다.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은 현지어를 배우고 익힘에서부터 그 첫걸음이 시작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느 식당, 어느 시장, 어느 커피숍이 좋다는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현지에서 잘 적응하며, 멋진 단원활동을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순서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Q6. 사람들이 코이카 해외봉사단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최근에 “코이카의 꿈”이라는 TV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리고, 낙뢰로 인해 사망한 어느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의 소식을 통해서, 코이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큰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일련의 매체 방송과 뉴스를 통해서 코이카 해외봉사단의 이름이 좀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잘못 알려진 부분 중에 하나는 코이카는 기독교 단체라는 오해입니다. 코이카(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는 일반적으로 선교의 목적으로 나눔과 베품이라는 겉모습으로 저개발국가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다양한 종교 단체의 구성원들과 그 겉모습인 “나눔과 봉사”라는 표면적인 모습만 같을 뿐입니다.코이카는 지구상의 수 많은 저개발국가와의 협력과 발전을 지원하는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정부산하단체입니다. 나눔과 봉사의 겉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개종이나 선교를 본래의 목적으로 하는 종교단체와는 완전히 다른 단체입니다. 오히려 파견 전 국내에서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교육을 받을 때, 파견 후에는 현지에서 선교 홛동 금지라는 지침을 교육받고 있으니, 코이카는 종교단체라는 오해는 정말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번에 낙뢰사고로 사망한 어느 코이카 국제협력요원의 사망 소식을 통해 코이카가 산업체 근무요원처럼 군대 대신에 복무하는 군복무 대체근무제도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제협력요원은 코이카의 해외봉사단원들의 여러 신분상의 유형중의 한가지일 뿐입니다. 군복무 대신에 해외봉사단원 활동을 하는 국제협력의사도 있고, 해당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관련분야 경력이 있는 50세 이상의 시니어 해외봉사단원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수를 차지하는 젊고 패기 넘치는 일반해외봉사단원들의 수에 비해 국제협력요원의 수는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제협력요원은 군복무 대체라는 큰 목적이 있는데,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해외봉사단원들의 순순한 나눔과 봉사라는 의미까지 퇴색되는 것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제 주변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코이카에 대해서 가장 많이 궁금해 했던 것은,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의 급여입니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에게는 공식적으로 급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견 기간 중에 매월 50만원(2012년 기준)씩 적립되어 귀국 후에는 1,000만원이 넘는 금액을 국내 정착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과 또 파견국 현지에서 생활할 때에 필요한 식생활, 통신, 교통비 등을 위해 각 파견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몽골의 경우에는 원화로 환산했을 때 매월 50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현지에서 생활하기 위한 금액을 생활비의 명목으로 받고 있습니다. 주거비는 현지 생활수준에 따라 일정금액 한도에서 실비로 별도로 청구되고 정산되고 있으니, 단원 한 명당 매월 100만원이 넘는 국민의 세금이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명목의 내용들이 생활비, 정착금 등으로 지급되고 있으니,“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의 급여는 얼마?“라고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Q7. 코이카 해외봉사단을 다녀온 후 가장 많이 느낀 점은?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2년간의 기간을 다녀온 후에 오래된 큰 소원을 성취해낸 느낌이 듭니다. 나눔과 봉사, 베품이라는 것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고 싶다 경험해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여러 가지 주변 상황들을 떨쳐내고 시도해보기는 참 어려운 것이 분명한거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희망의 길을 실제로 선택을 했고, 열심히 보람차고 성실하게 잘 해냈다라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다고 자부하고는 있지만, 앞으로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열심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도 긍정적인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귀국하고 보니 2년의 기간은 그리 짧은 기간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에 있어서의 재적응은 쉽게 할 수 있었지만,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 되어 파견되기전에 10여년을 해오던 분야에서 귀국 후에 다시 같은 분야에 직장에 재취업을 해서 근무하려고 그 2년간의 경력공백이 컸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Q8. 코이카 해외봉사단에 지원하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어떠한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남을 위하는 마음 변치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