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과 이상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후, 김기림의 추도문에 나타난 특징을 분석하여 서술하시오

 

서론

“추도문(追悼文)”의 사전적 의미는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면서 쓴 글이다. 그러므로, 추도문은 추도문의 대상인 죽은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대상을 생각하며 슬퍼하며 추도문을 쓴 글쓴이가 있어야 한다. 이 글() 이상(李箱)의 추억은 죽은 이상(李箱)을 생각하고 슬퍼하면서 친구로써 김기림(金起林)이 쓴 글이므로 추도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 추도문에서 글쓴이 김기림은 먼저 고인이 된 시인으로서의 문학동료이자 친구인 이상의 죽음을 어떤 문구와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지, 고인에 대한 추억과 남아 있는 사람의 그리움과 슬픔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를, 보통의 일반 사람보다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김기림의 마음이 어떻게 고스란히 표출되었는지,  이 추도문의 글쓴이의 심정을 이해하고 글의 내용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본론

김기림(金起林)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1907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1933년 정지용, 박태원, 이상, 이효석 등과 구인회 활동을 하며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의 니혼대학 영문학과 중퇴를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문학과를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1936년 첫 시집 “기상도”를 출간하였고, 6.25전쟁 발발 후 납북되어 사망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이상(李箱) 1910년 서울 출생으로 태어났고,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30“12 12을 연재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구인회의 창립멤버는 아니지만, 김기림, 이태준, 정지용 등의 문인들과 교류를 하였고, “오감도라는 제목의 연작시로 발표를 하였으나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1936년 결혼 후 일본 도쿄로 갔으며 1937년 일본경찰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요절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건축무한육면각체”, “거울등의 시와 소설 날개등이  있다.

김기림이 죽은 이상을 기리며 쓴 이 추도문은 1937 6월에 조광에 발표되었다.  이 추도문을 통해서도 그리고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구인회에서 함께 활동한 시인으로 김기림과 이상은 분명히 서로에게 돈독한 친분이 있는 관계이다. 이 추도문에서 이상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약속의 말인 "그럼 다녀오오. 내 죽지는 않소"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 둘의 관계는 문학적 동료이면서 친구인 듯하다. 김기림이 이상보다 3살 연상인데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친구끼리 나누는 것같은 말투를 사용했다는 것은 김기림이 이상을 어린 나이의 지인으로 여기지 않고 이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김기림은 당시의 명문학교였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입학했으나 중퇴를 하였고 이상은 동광학교라는 다른 학교에 입학 했다가 이 학교가 보성고등보통학교와 통폐합되어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졸업자가 되었으니 이 둘은 동문으로서의 관계라고 하기엔 애매한 선후배 관계라고 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던 김기림과 이상은 같은 학교를 다녔던 관계이며, 구인회 활동을 함께 했던 시인으로 서로에게 친분이 있었고, 더군다나 한반도를 벗어나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지냈던 시기도 겹쳐있으니 이 얼마나 반갑지 아니했겠는가. 하지만, 김기림은 일본에서 이상의 숙소에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 않았기에 이상을 일본 땅에서 자주 만나지 못했었음을 김기림은 이 추도문을 통해 아쉬워하고 있다.

문학인답게 시인스럽게 추도문의 시작은 깊이 있는 멋진 문장으로 시작한다. “()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은 아니리라”.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은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것이다. 또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추도문의 중간중간에 나오듯이 김기림은 이상을 천재로 여길 정도로 이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상의 비보를 믿고싶지 않았을것이다. 첫 문단에서 이상이 당시의 사회환경과 사람들이 이상을 높이 평가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이상은 시를 쓸 때 피가 흥건한 혼혈의 시를 썼던 평범한 시인이 아니었음을 평가하며 연이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김기림은 낯선 땅 일본에서 이상을 찾아가 만났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설명하면서, 이상의 외모에서 느낄 수 있었던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이상의 초췌함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추도문에 아주 상세하게 표현함으로써 죽은 벗이었던 이상을 다시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추도문을 통해 살아생전의 이상을 시인으로서의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와 당시의 환경이 이상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흐리고 어지럽고 게으른 시단(詩壇)의 낡은 풍류에 극도의 증오를 품고 파괴와 부정에서 시작한 그의 시는 드디어 시대의 깊은 상처에 부딪혀서 참담(慘憺)한 신음 소리를 토했다. “라는 표현을 통해 이상은 참담한 시대적 상황을 파괴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신음의 소리를 내는 시를 썼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시적인 문장을 통해 이상의 천재성과 낡은 풍류에 도전하는 이상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추도문에서는 도쿄에서 이상이 지내고 있는 숙소와 이상의 초췌한 모습을 상세히 표현하면서, 이상의 죽음을 넌지시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느낌을 표현하고도 있다. “상의 숙소는 구단(九段)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이었다”, “그의 얼굴을 상아(象牙)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엽이 코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하다”, “그리고 햇볓이 드는 옆방으로 이사하겠노라고 하는 상의 뼈 뿐인 손을 놓고 나는 도쿄를 떠나면서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캄캄했다등에서 이상의 숙소와 모습에서 누가 보아도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환경과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정을 김기림은 추도문을 통해 기억을 꺼내 적고 있다.

추도문에서 이상이 마지막 들려준 말로 그럼 다녀오오. 내 죽지는 않소라는 말을 직접 인용을 해서 적어놓았다.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 간접적 인용을 통해 “~라고 말했다라고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고 쓸 수도 있겠지만, 직접적으로 따옴표를 사용하여 이상의 마지막 말을 적어냄으로써 이상과의 마지막 상황을 더 크게 기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친구들이 고인의 글들을 모아 유고집을 만들어주는 것을 도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김기림은 죽은 이상을 위해 남은 친구로서의 다짐을 하고 있다.

 

결론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지인으로서의 김기림과 이상의 관계는 시인이라는 같은 직업을 가졌고, 같은 학교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같은 시기에 다녔고, 구인회라는 문학단체에서 활동하며 모더니즘 시의 발전에 함께 노력하였고, 같은 시기에 식민지 한반도를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였던 우연과 인연은 당시의 이상의 지인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깊은 사이였음은 당연하다. 그러한 지인이 멀리 타지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을까? 더군다나 자신은 그를 천재로 인정하고 있으나, 세상과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체 날개를 펼쳐보지 못하고 죽은 이상을 그리워하며 더욱 슬픈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추도문은 죽은 자, 즉 추도문의 대상인 자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쓸 때 가장 애틋한 마음이 잘 표현되고, 그 그리운 마음을 이 추도문을 읽는 사람들과 가장 깊이 있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추도문 () 이상(李箱)의 추억은 이상의 살아생전에 가장 가까웠던 지인중에서 김기림만이 쓸 수 있는 죽은 이상에 대한 최고의 추도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우라질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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