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서론 : 철학이란 무엇인가? |
일상에서의 철학은 인간의 삶의 보존과 향상을 위한 지적 대응의 성격으로 제반 학문활동과 연결되며,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라는 철학의 어원적 정의처럼 철학은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이고 필연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양한 분야의 개별과학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은 철학의 인간과 우주에 관한 형이상학적 전통적인 지식체계를 흔들어 놓으며, 철학의 위기가 운위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철학은 개별과학의 분화와 발달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별과학들에 대한 총제적이고 근본적인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써, 개별과학의 문제영역과는 다른 철학 나름의 고유한 탐구 영역을 갖고 있으며, 태두 러셀(B.Russell)의 “철학은 여러 개별과학의 기본개념을 명확하게 하며, 서로 다른 개별과학들의 성과를 종합하여 세계에 대한 하나의 종합적인 관점을 갖게 하는 지식”이라고 정의한 내용처럼 철학은 여전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철학의 존재론은 개별과학이 다루는 대상을 특정 대상의 차원이 아니라 대상 일반의 차원에서 비판적이고도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영역으로, 우리의 의식과 물질적 시공의 모든 것을 존재자로서 다룬다. 인식론은 특정의 대상을 특정의 인식방식으로 탐문하여 진리인식으로 목표로 하는 개별과학의 일반적인 탐구방식과 지식 전반에 관한 반성적 탐문의 과제로서 진리와 인식의 의미, 범위, 기분, 조건으로 문제 삼는 철학의 연구영역이다. 개별과학은 각 개별과학의 탐구영역에서 개별 가치에 주목할 뿐이지만, 철학의 가치론은 총제적 관점에서 가치일반에 관한, 가치의 근원은 무엇이고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가치는 비교와 기준을 인간의 기준에 왜 추구되어야 하는지는 탐구하는 영역이다. 철학의 전통적 연구영역 이외에 논리학도 철학의 주요 분과로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는 고도로 발달한 개별과학에 대한 총체적 탐문으로서 철학의 정체성 위기의 논란으로부터 논리학은 개별과학적 판단들이 명료하게 사용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탐문으로 인식론적 문제의식과 함께 현대철학의 중심적인 영역을 이룬다.
인간은 환경세계에 대한 대응방식으로 지식을 추구하고, 올바른 지식 즉,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였으니, 철학은 인간에게 숙명적인 것이다. 철학이 추구하는 그 진리를 향한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철학은 종교처럼 문제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확고부동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데, 종교에 제시하는 진리와 철학에서 이성적인 숙고들 통해 얻어지는 지리는 다른 의미의 진리이다. 종교는 신앙을 통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추구하지만, 철학은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이성의 눈으로 문제 상황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철학은 일상적인 태도와 생각들을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조직하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소크리테스가 “자기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라고 말했듯이 철학을 합리적이며 유용한 삶의 선택들을 폭 넓힐 수 있으며, 사고, 감정, 행위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태도와 균형감각을 갖출 수 있게 한다.
제4강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 사랑에 대한 성찰 |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이며 위대한 힘을 지닌 사랑은 인류를 인본주의적 인간으로 탄생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지만, 맹목적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자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랑은 서양인들은 사랑을 에로스(eros), 아가페(agape), 필리아(philia) 세 가지로 이해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비록 비극으로 끝나지만, 사랑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영화“데미지”에서는 사랑의 파멸적 힘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만큼 사랑은 연약한 인간에게 너무도 막대하여 신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그리스인들은 사랑의 열정에 “에로스”라고 불렀다.
에로스(eros)는 원래 특정 대상이 지닌 수려한 외모와 인격의 선함 등 때문에 생겨나는 성적인 열정의 욕망을 의미하는데, 자기가 지내기 못한 상대방의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연인으로 삼는다는 특징이 있어서, 에로는 자기의 결핍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욕망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에 대한 정의로, 본래 인간은 남과 남, 남과 여, 여와 여로 한몸이 되어 있었는데, 신에 대한 공격으로 둘로 나누어진 이후로 본래 하나였던 인간이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자 노력하는 열정이다라고 하였다.즉, 사랑이란 분리와 결핍의 고통에 대한 치유의 행위이며,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에 붙여진 이름이 사랑(에로스)이다라고 말하였다.
바타유는 인간은 잃어버린 연속성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은 태어나면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개별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합일의 열망은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하였다. 루크레티우스는 갈망과 권태를 반복하는 사랑에 빠지지 말 것을 권하며, 성적 쾌락에 머무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결핍의 욕구를 채우는 정도로 멈추고 더 이상의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는데, 플라토닉 러브는 두 연인이 애정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며, 영혼의 완전성, 추상적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의 열정을 말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자신의 결핍으로부터 갈망하려는 욕구인데, 아리스토파네스는 갈망의 대상을 갖게 되면 욕구가 사라지고 행복하게 된다고 하였으나, 때로는 상실의 두려움으로 변질되거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집착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사이비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오해와 사이비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선을 간직하고 있는 우상으로 바라보는 우상숭배적 사랑과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성취하려는 부모들의 흔히 갖는 비기이적인 헌신, 사랑과 갈등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사랑이라고 보는 환상, 사랑이라는 구실로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을 자신의 허상으로 구속하거나 맹목적으로 자기를 옮아메는 것은 잘못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제6강 대중문화는 정말 대중의 문화일까? – 대중문화의 철학적 이해 |
문화(culture)는 인위적으로 자연을 개조하여 계획과 노동을 통해 단순히 농경상태에 머무르지 않는 자연과의 단절로써의 모든 인위적 삶의 총체를 넒은 의미하며, 오늘날에 문화는 주로 대중문화 영역과 연관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근대이전에 문화는 귀족들만의 문화에 비해 근대적 의미의 대중이 형성되고 사회적 주류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서민들의 대중문화는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즉, 귀족 중심의 사회가 시민계급 중심의 사회로 변모하면서 전통적인 예술 장르들 뿐만 아니라, 문학장르의 내용이 시민계급의 눈높이에 맞추어지게 되었으며, 도시 노동 계층이 중산층을 이루게 되고, 그들의 여가와 오락이 대중들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20세기에 기술적 수단으로써의 대중매체(mass media)의 발전은 문화를 대중화하는데 기여했고, 대중문화를 창조하고, 그 결과물을 향유하며, 대중들이 참여 가능하도록 한다.
20세기의 주류 문화로 성장한 대중문화의 특성으로는, 첫째, 대중문화는 신분의 차별에서 벗어난 해방된 대중들의 문화이고, 둘째, 대량생산고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대중매체에 의한 문화이며, 셋째, 상업화된 문화라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에 특성에 따라 그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대중문화의 상업성과 대중문화의 수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수반된다.
대중문화는 대중이 만들고 향유하는 문화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대중문화의 주체를 대중이라고 볼 수 있고, 대중의 소비를 위해 만들어진 문화라고 보는 관점은 대중문화의 주체를 대중문화를 생산하는 거대한 자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대중들은 대중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이지만, 문화산업을 지배하는 거대 자본들은 대중문화를 기획되고 도구화하고 있으며, 대중은 스스로 대중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대중들은 음악이나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감상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비평하고 평가함으로써, 대중문화 공급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한다. 이러한 대중의 바람직한 대중문화 수용의 토대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민주적 질서가 바로잡혀야 하며, 대중들의 비판적 지성이 고양되어야 하고, 대중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능동적인 개입과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대중은 합리적인 소비자로서의 역할도 필요하다.
뉴미디어의 출현 이전에는 대중의 개인들은 자신의 정서나 생각을 대중문화라는 큰 틀에서 표현할 길이 많지 않았고, 소통의 수단이 다양하지 않고 규제가 강한 사회에서 대중들의 표현은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과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컴퓨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를 통해 대중들은 누구나 쉽게 정보를 이용하기도 하고 재생산하기도 한다. 대중은 수동적인 문화소비자 입장에서 벗어나 허용된 자유를 누리면서 문화를 창조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효과적인 수단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인터넷이나 SNS 등의 뉴미디어의 운영 기반 역시 거대자본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력기관에 의해 정보기술이 약용될 영우 인권침해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