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The American Civil War) - 황상규
I. 발발 원인과 배경
미국은 식민지 시기부터 남부와 북부의 산업구조가 달랐다. 남부는 면화와 담배 등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했고,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했다. 그러한 경제적 구조의 차이로 남부의 주들은 노예제도에 찬성을 하였고, 북부의 주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자유주(free-State)가 되었다. 그러한 남부와 북부의 주들 사이의 경제적, 산업적 구조차이가 있었으나, 미국 연방의 붕괴를 원하지 않았기에, 예민했던 노예제도 문제를 정치적 힘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었다.
건국 이후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 사이의 균형은 이루어지는 듯 하였지만, 미국 영토의 계속된 확장으로 인해 새로 연방에 가입하는 주가 늘어나게면서,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노예주와 반대하는 자유주 어느 성격의 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북 모두에게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1820년 연방은 22개주 중에서 노예주와 자유주가 11개씩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연방에 가입하게 되면서 그 균형이 깨질 뻔 하였는데, 메인주를 자유주로 편입함으로써, 다시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새로운 주가 생기는 경우에는 미주리주 남쪽 경계선인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윗쪽에 생기는 주는 자유주로 남쪽에 생기는 주는 노예주로 하자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 1820년)이다. 하지만, 이 타협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었다. 이후 텍사스의 병합과 멕시코 전쟁 등을 통해 광대한 지역이 미국에 편입되고 새로운 주가 생기게 될 때마다 노예제도는 문제가 되었다.
1849년 서부의 넒은 영토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준주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 신청을 하자 노예제도를 둘러싼 위기감이 다시 감돌게 되었다. 캘리포니아를 남부와 북부 모두 양보할 수 없었는데, 1848년 멕시코로부터 양도받은 영토에 대해서도 노예제 실시여부가 확정되지 않았는데, 그 곳에 북부 출신이 대거 몰려와서 모두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게 될것이 뻔하여, 남부의 노예주들은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경고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일리노이주의 스티븐 더글러스 상원의원이 절충안을 제시하여 의회를 통과하게 되어 남부주들의 연방탈퇴를 막을 수 있었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인 스티븐 더글러스는 네브래스카 쪽으로 대륙횡단 철도 건설하려고 하였는데, 북위 36도 30분 위쪽의 주는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는 미주리 타협에 의해 네브래스카는 자유주가 될 것을 우려한 남부의 노예주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래서 스티븐 더글러스 상원의원은 미주리 타협을 무효화하고, 이 지역을 네브래스카와 캔자스로 나누고 국민주권을 통해 주민들이 자신들이 노예제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Kansas-Nebraske Act. 1854년)을 발의하여 통과되었다. 그러자, 캔자스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노예주인 미주리에서 캔자스지역으로 이주하고, 노예제를 반대하는 이주민들도 캔자스로 밀려들어서 되었고, 1855년 캔자스는 주민투표에 의해 노예주로 결정되었다. 그러자, 노예제를 반대하는 진영에 의한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캔자스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이 지역에서는 그 두 진영 사이의 “피 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라고 불리우는 사태의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II. 전개과정과 전투내용
켄터키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링컨은 1858년 일리노이주의 상원의원 후보가 되었는데, 민주당의 상원의원 후보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발의하였던 정치적 거물 정치적 거물인 스티븐 더글러스이었다. 그 둘 사이의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의 초점은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연방의회에 있는지에 관한 문제였는데, 링컨은 연방의회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있다고 하였고, 더글러스는 각 주의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하였다.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의 더 이상의 확장을 반대하며 공화당의 후보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링컨이 취임하기도 전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남부의 노예주들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별도의 헌법을 만들고 별도의 대통령을 선출하므로써, 미국은 두 개의 국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남북전쟁의 시작은 미연방의 군사 기지였던 섬터 요새에 대해 남부 연합군이 1861년 4월 12일에 공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연방군은 요새를 탈환하고 연방을 수호하고자 저항하였지만, 그 규모가 너무 적어서 링컨은 각주에 의용군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남부와 북부 사이의 네 개의 주들은 연방에 군사를 보내기를 거절하며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연합에 참여하였다.
1861년 북부연방은 우월한 해군력을 동원해 남부의 모든 항구들을 봉쇄하고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외국에서 대부분의 전쟁물자를 들어오고 있는 남부연합을 고립시키려는 아나콘다 계획을 수립하였다. 1861년 5월에 시작된 이 계획으로 남부연합의 외국과의 통상은 급속이 위축되었고, 무기와 식량를 들여올 수도 없게 되었으며, 미시시피 강 전선을 따라 전개된 공방전에 남부 연합군은 빅스버그가 함락됨으로써, 남부는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서로 나뉘어 지고, 남부의 텍사스가 연방군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던중, 1863년 1월 1일 링컨은 역사적인 노예해방선언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링컨의 노예제 폐지에 대한 선언은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과 프랑스가 남부의 연합군을 지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게 하였다. 남부연합군을 지지하게 되면, 노예제를 지지하게 되는 모습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노예해방선언은 노예제를 종식시키고 외국의 여론을 링컨의 연방정부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선언문은 남부의 노예들을 부추겨 북부연방군에 가담시키는 동시에, 노예제도를 유지한 채 연방에 속한 남부와 북부 사이의 “경계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빅스버그 전투의 승리로 미시시피 강을 확보하고, 텍사스 주를 손에 넣은 연방군은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압박할 계획을 세웠고,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리 장군은 북부연방의 수도인 워싱턴을 항박시켜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다. 마침내 1863년 7월 1일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 접경의 게티즈버그에 이르러서, 남북전쟁의 분수령으로 평가되는 대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국 남부연합군은 버지니아로 철군하면서 게티즈버그 전투는 북부연방이 승리가 되었다.
남부연합군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지만, 저항은 격렬했고, 북부연방군의 총사령관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은 동부와 서부 부대로 병력을 나누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동부부대는 남부연합군의 전력을 소진시키면서 리치먼드로 진격하고, 윌리엄 셔먼 장군의 서부 부대는 애틀랜타로 진격해 존스턴이 이끄는 납부연합군을 격파하는 작전을 펼쳤다. 그랜트 장군은 진격을 하면서 철도와 항만 등 남부의 기간시설과 농장, 공장들을 초토화시켜 회복불능 상태로 만들었고, 셔먼 장군은 애틀랜타를 점령한 후 대서양의 항구도시인 서배너까지 점령하였다. 북부연방군의 공세가 전개되는 1년 동안 양측 모두 수만 명의 병사들이 희생되었으며, 결국 1865년 4월 3일 치열한 전투 끝에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북부연방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리 장군은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에서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한다. 그랜트 장군의 항복은 4월 16일 남부연합의 공식적인 항복으로 승인되었고, 존스턴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도 4월 18일 항복함으로써, 4년간 치뤄진 미국의 내전은 북부연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III. 전쟁의 결과와 영향
북부연방의 승리로 연방유지라는 전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으며, 전쟁의 명분이었던 노예 해방도 이룰 수 있었다. 결국 미국은 하나의 연방으로써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 자유인이 된 흑인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산업화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인해 인명 손실의 희생이 너무 컸다. 군인 전사자로 북부 연방에서는 36만명, 남부연합에서는 26만명의 목숨을 잃었는데, 이 전체 전사자 수는 당시 인구의 약 2%에 달하였으며, 또한 민간인 사망자 수도 엄청났다. 또 대부분의 전장이 남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남부의 생활 기반은 완전히 황폐화 되었는데, 마을과 농장 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흑인들마저 잃게 되어, 남부의 주들은 연방정부의 군정을 받아들이고, 흑인들의 시민권과 선거권까지 인정하는 조건으로 다시 연방에 가입하였다. 이후 1877년까지 남부는 전쟁의 폐허로부터 재건을 위해 힘든 시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인명과 재산, 산업기반의 손실보다 이 전쟁으로 인한 남부와 북부, 백인과 흑인 사이에 깊은 증오와 편견은 그 이후로도 더 깊게 미국 사회와 정치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북전쟁이 북부연방의 승리로 끝나고 흑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 되었으며, 수정헌법 15조의 제정에 따라 흑인들도 선거권을 갖게 되었으나, 실생활에서 흑인들은 여전히 자유를 누릴만한 힘도 정치적 권한을 누릴 능력도 갖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능력도 없었다. 도시로 몰려든 흑인들을 반기는 곳도 없었고 그나마 힘들게 일자리를 구했더라고 노예와 다름없는 일들 뿐이었다. 농촌 지역의 흑인들도 자신들 소유의 경작지가 없었으니, 기존의 백인들의 농장에서 묶여 빚을 지고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수정헌법에 따라 흑인들도 선거권을 갖게 되었지만, 대다수 남부 백인들은 흑인들이 정치권을 갖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고, 그들은 KKK(Ku Klux Klan) 같은 비밀폭력단체를 조직하였다. KKK는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반(反)로마 가톨릭교회, 기독교 근본주의, 동성애 반대 등을 표방하며, 흑인들의 정치적 진출을 막고 흑인들을 백인과 같이 지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흑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 즉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자들에게 테러와 폭력, 협박을 하였다.
흑인들은 정치적으로 힘이 없었으며,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불평등한 대우를 1960년대의 시민권 운동이 결실을 맺기 전까지 감당하며 살아야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서명 한지 약 1백년이 지나서 1963년 8월28일 마틴 루터 킹은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에서 자신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 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 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라는 “I hava a dream”이라고 알려져 있는 연설을 하며 흑인들 시민권 운동을 주도하였다.
IV. 과제를 통해 알게 된 사실 & 과제소감
남북전쟁이 흑인들의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 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역사를 바로 알고 있지 못했던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세계 전쟁사에서는 항상 명분이 존재했던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한 1차 산업 기반의 미국 남부와 달리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던 북부의 주들의 주도 아래 미국의 산업화 재편과정에서 남부의 주들은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새로 연방에 편입되는 준주들이 자유주로서 가입이 늘어나면서 위기감을 느끼는 시기였다. 어렵게 주권국가로 독립하여 연방유지라는 큰 목표가 있었지만, 남부의 그러한 불만과 위기감은 이 전쟁이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과정에서 남부와 북부의 노예제도에 대한 극렬한 차이는 새로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명분이 되었으니, 그것이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던 전쟁의 원인이었다. 전쟁이란 손익에 관한 이해관계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북전쟁은 원래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으며, 1차 산업기반의 미국 남부의 주들이 자신들의 농업기반의 산업이 어려워 질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번 “미국의 사회의 문화” 수업과 과제를 통해서, 남북전쟁에 관한 잘 몰랐던 새로운 내용들을 알 수 있었다. 수업 중에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영어로만 수업이 되었더라면, 새로운 영어 단어의 뜻과 내용, 문장의 구조와 해석에 빠져서 진짜 소중한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있게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과제를 통해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으니, 영문과 3학기째 수업을 들으면서 수업의 목표에 가장 충실했던 수업이고 과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문장 해석에 치우친 수업이 아니었기에, 이 과목명에 맞는 수업의 목표에 충실한 미국의 역사와 그 속의 내재되었 있던 미국의 문화들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어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