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목명 | 소설창작론 |
학 과 | 영어영문과/국어국문과(복수전공) |
성 명 | 황상규 |
과제명 | 본인의 가족을 포함하여 주변에서 가족관계의 문제나 세대 간의 갈등 사례를 수집한 후, 이를 다음의 조건에 따라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하시오.(30점) ① 이야기의 의도를 담은 창의적인 제목을 붙인다. ② 갈등은 세대의 특징이나 가치관을 대표하는 인물 간의 대립으로 보여준다. ③ 인물의 생각과 태도, 대립을 보여주는 사건을 구성하여 배치한다. ④ 각 인물의 정보와 성격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서술방식을 활용한다.(인물의 특징에 대한 묘사와 서술, 직업 혹은 사회적 역할 및 관계, 인물의 과거사 요약, 가족관계에 대한 스케치 등) ⑤ 1인칭 관찰적 서술자를 내세워 서술하고, 어조와 문체가 통일성을 갖추도록 유의한다. |
지시사항 | - 답안 작성 시 과제명을 제외하고 문항 번호와 답안만 작성할 것 - 과제명 및 평가 관련 문의처: 국어국문학과 - 아래아한글 혹은 MS-word로 작성할 것 - 분량 : A4 기준 4-5매(공백포함 5000자 ~ 7000자) - 서론-본론-결론’과 같은 목차는 불필요함. - 타인의 이야기를 무단으로 옮기거나 타인의 과제, 상업 자료를 표절할 시에는 감점되거나 0점 처리될 수 있음. - 글쓰기의 기본요건과 과제의 조건을 제대로 충족시킬 것. |
제목 : 엄마 |
1940년. 만주. 헤이룽. 엄마는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엄마의 기억이 그러하고, 그 당시의 엄마는 어린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그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의 엄마의 만주살이 이야기를 지금도 가끔 들려주고 있으니, 엄마는 만주벌판 태생이 틀림 없어 보인다. 내가 열다섯 무렵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엄마의 만주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적어 가끔은 아쉽기도 하다.
엄마는 흑룡강성 태생이다. 엄마는 “헤이룽”이라고만 알고 있고, 정확한 위치도 알지 못한 체 만주라고만 말한다. 뉴스 매체 등에서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동북3성 중의 하나이고 만주벌판 북쪽 끝에 위치한 곳이 흑룡강성이다. 그곳에서 경기도 양평의 몇남 몇녀 중의 장남인 외할아버지가 사업을 위해 먼저 가서 살고 계셨고, 강원도 영월의 김진사댁 몇남 몇녀중의 장녀였던 외할머니는 그 먼곳 만주로 시집을 가셨다고 했다. 그 먼곳으로 핸드폰도 없이 내비게이션도 없이 어떻게 찾아갔을까 놀랍고 굉장한 일을 외할머니는 해내셨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만주에서 어떤 사업을 하고 계셨는지는 엄마도 알고 있지 않지만,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물어봤겠지만) 어린 엄마의 기억에 외할아버지는 트럭 몇 대를 소유하고 있었고, 집안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겨울이면 도축한 돼지를 통째로 처마에 메달아 놓고는 필요할 때마다 기다란 칼로 쓱쓱 베어내며 음식재료로 사용하곤 했었다고 한다. 장남이었던 외할아버지는 경기도 양평에 살고 있던 친척들을 만주로 불러 같이 사업을 했고, 엄마의 몇째 작은 아버지는 만주에서 보내준 돈으로 고향에 땅도 사고 산도 사고 집도 샀다고 했다.
그러던 중 모든 한국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맞았는데, 그 무렵에 엄마는 직접 보지는 않았겠지만(분명히 외할머니한테 전해 들었을 테지만) 외할아버지는 같이 일하던 중국인 직원에게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엄마는 일제 강점기의 그 혹독했던 일제의 만행을 겪는 대신에 중국인에 의한 아버지를 여읜 소녀가 되었고, 일본인보다 중국인을 더 혐오하는 반공주의의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한 된 듯 하다.
광복을 맞았지만, 만주에서 서울로 다시 들어오던 엄마의 가족들은 남편없고 아버지 없는 가난한 한 가정 일뿐이었다. 엄마의 작은 아버지들은 외할아버지의 재난을 멋대로 나누었고 그 동안 만주에서 고향 땅으로 보낸 돈은 엄마의 몇째 작은 아버지의 것이 되어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기억에 만주에서 서울로 오는 여정은 기차이야기만 남아있다. 꽉꽉 들어찬 서울행 기차에서 이제 겨우 서너 살도 안된 동생 몇몇을 홍역과 폐렴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서울에 도착했으니, 어린 엄마의 마음보다 대여섯 자식 중에 겨우 두 명 만을 남기고 모두 가슴에 묻어버린 외할머니의 슬픔이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외할머니는 남편을 잃고, 재산도 잃고 자식도 잃고 낯선 땅 서울에서 광복을 찾아 돌아 왔지만, 광복하지 않은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이야기에는 외할아버지가 다시 등장한다. 우체국에 근무하는 체신부 공무원에게 외할머니가 살아남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안고 재혼을 했던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외할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외할아버지의 집안에서는 같은 집안 사람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렸고, 재산을 가로 챈 엄마의 작은 아버지들로서는 가로 챈 재산을 더 이상 나누지 않아도 될 명분마저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에서야 다시 만주벌판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엄마의 아빠, 나의 외할아버지의 곁에 함께 묻힐 수 있었다.
엄마는 스스로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억척같았었다라는 말을 빼먹지 않는다. 김진사댁 딸로 곱게 자라고, 만주벌판에서도 떵떵거리고 살았다던 외할머니에 대한 엄마의 판단은 이 험한 세상에 곱게는 살지언정 힘차게 살아가기는 어려운 스타일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서울에서 부산 영도로 피난을 갔을 때에도 이제 열살 짜리 소녀였던 엄마는 화재로 전소된 곳에서 땔감거리를 주워와서 외할머니를 놀라게도 또 기쁘게도 했다고 했다.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녔던 엄마는 동네 또래들의 여자중학교 교복이 그렇게 입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새 아빠는 여자의 공부를 바라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옷감 만드는 공장의 똑순이로 청춘을 시작하게 되었다. 의지할 친아버지는 중국사람의 총을 맞고 돌아가셨고, 엄마의 작은 아버지들은 엄마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엄마의 엄마는 험한 세상을 스스로 극복해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곱순이였으니, 그 당시 유행했던 어느 기독교 종파의 부흥집회는 의지할 데 없는 엄마의 답답한 가슴을 채워주고도 남았으리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하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서였을까, 아니면, 인생의 기억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일제강점기로부터의 해방과 무시무시한 한국전쟁의 공포와 분단의 슬픔을 보았기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스물 일곱살, 그 때 당시만해도 엄청난 노처녀의 나이가 되었을 때까지도 시집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는 덜하겠지만, 결혼을 통해 현실로부터 탈피를 꿈꾸고 새로운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은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가 예전에는 많았던 것 같다. 엄마는 스물살 무렵부터 다녔던 그 교회(이미 수십년전에 한국 기독교 교단에서는 사이비로 지정된 바 있다)로부터 답답한 삶에 대한 해소가 완전히 되지 않았었는지 어느 날 내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다. 언제인가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
엄마와 아빠는 여섯 살 나이 차이가 난다. 엄마 나이가 스물 일곱살이었고, 아빠 나이가 서른 세살이었으니, 그 때 당시의 처녀 총각의 나이로는 늙을 대로 늙은 보물급 처녀 총각이었다. 엄마는 아빠를 엄마가 다니고 있던 공장의 누군가로부터 소개받았다고 했다. 대부분의 남녀간의 만남에서 그러하듯이 엄마도 아빠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집에 찾아와서 외할머니에게 큰절을 올리고 딸을 달라고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엄마의 험난한 두번째 인생이.
아빠와 엄마는 딸 한 명과 아들 둘을 낳았는데, 아빠는 첫 번째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집에서 빈둥거리기 일쑤였다고 했다. 평양 동쪽(현재 주소로 평양특별시 승호지구)에 내 친할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얻은 5남 1녀중 막내아들이었던 내 아버지는 어리광을 다 때기 전에 부모님과 헤어져 남쪽으로 피난을 왔으니, 남쪽 생활과 전쟁 속에서 형들뿐인 가족틈에 어리광도 버리지 못했고, 책임감도 스스로 배워내지 못했었다.
그런 와중에 미녀(내가 봐도 엄마는 미녀다. 나이 팔십이 넘은 지금도 미녀스러운데, 처녀적 사진을 보면 누가봐도 넘어갈 타입이다)인 엄마를 알게 되었으니, 아빠의 남성 본능을 탓할 수야 있으랴.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고난의 2부는 아빠와의 결혼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누나가 태어났다. 엄마의 친정은 청와대 뒤쪽 인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세검정이라는 동네였다. 엄마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였던 외삼촌이 결혼해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었고, 엄마가 결혼하기 전까지 공장을 다닐 때에 계속 살던 동네이다. 그곳에서 누나를 낳았다.
누나는 1968년 1월 20일 태어났다. 그리고 다음날 일명 1.21 사태가 일어났다. 북한인민공화국(북한)에서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들을 청와대를 목표로 침투시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던 사건이 1.21사태라고 한다. 청와대 뒷마을이었던 세검정 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또 다시 전쟁이 났다며 모두 피난을 갔다고 했다. 하지만, 외할머니와 첫 딸을 낳은 엄마와 태어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는 피덩어리 누나는 피난을 못 갔다고 했다. 기구해야만 운명의 팔자였는지 아빠는 첫딸을 안고도 기뻐하기는커녕 못생겼다며 싫어했다고 했다. 누나와 나는 아빠를 빼닮았고 세 남매중 막내인 남동생은 엄마를 빼닮았는데, 아빠는 딸바보의 희망을 보이기는커녕 자신을 닮은 첫 자식을 예뻐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 나이 열두 살, 누나 나이 열네 살 때, 아빠는 스스로 이 세상과의 이별을 선택했지만, 어떤 유서나 유언도 없었다고 하니, 아빠도 아빠 나름대로 답답한 인생에 대한 막막함에 힘겨웠으리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을 꼭 닮은 첫 딸을 대놓고 예뻐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엄마의 제2의 인생은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더니, 무책임한 못난 남편과의 이른 사별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십대 초반의 자식 세 명과의 남겨진 삶은 엄마에게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 엄마는 말하곤 한다. 아빠의 스스로의 죽음 이후에 엄마의 시댁(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월남했던 아빠의 네 형제 중 첫째네) 역할을 했던 첫째 큰어머니는 엄마에게 재혼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자식 셋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엄마는 아버지 복도 없고, 남편 복도 없었는데, 자식도 복도 없을지라도 그냥 운명이려니 받아들였을 것 같다.
아빠의 죽음 이후 첫째 큰집과는 자주 왕래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금까지도 자주 왕래를 하고 있고, 우리 삼 남매의 학비와 생활비, 심지어는 쌀값까지도 보태주셨던 넷째 큰아버지 큰어머니에 못지 않게, 그 형제 중 막내의 남겨진 식구들에 대한 안부를 궁금해하셨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해에는 첫째 큰집에서 우리의 셋방살이를 끝낼 수 있도록 작은 집도 한 채 사주셨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3년동안 수업료를 장학금으로 받기로 하고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의 진학이 예정되어 있기는 했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려면, 학비 면제만으로는 다닐 수는 없었다. 교통비도 필요했고, 교과서도 참고서도 사야 했다. 도시락도 두 개씩 싸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 당시 우리 집은 한 학교에 몇 명씩 있었던 생활보호대상자(요즘 사회복지 제도에서는 기초수급대상자)였던 시절이라 고등학교 진학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민학교 5년까지가 학벌의 전부였던 엄마의 소원은 자식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하는 거였다. 엄마가 나에게 부탁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엄마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고등학교까지 졸업해달라고.
엄마는 손수레에 간장을 싣고 팔러 다녔다. 새벽 첫차를 타고 다른 도시의 세차장으로 일도 다녔고, 수년간 같은 집의 파출부로, 어느 사무실 건물의 청소원으로 새벽 출근을 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의 정신적 강인함을 놓지 않게 해준 곳이 있었으니, 엄마가 이십대 초반부터 다녔던 그 교회이다. 내 또래 이상이면 한 두 번쯤 들어 봤음직한 사이비 종교로 낙인 찍혀있는 기독교계 종파이다.
지금 엄마는 그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몸이 교회로 향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교회로 향하고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팔순이 넘은 나이라 혼자서는 쉽게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생을 모셔온 그 교회의 사이비스러움(엄마에게는 신비스러움)을 더더욱 견고하게 간직하며 엄마는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뻔한 말이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이고, 그런 사회가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누구나 직업과 거주와 종교와 정치에 대한 자유로운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엄마의 팔십여년 인생 중에서 육십년 종교생활에 종지부를 찍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에게 그런 강요를 할 자격도 없을 뿐더러, 엄마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해주었고, 배신하지 않았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었으니, 지금의 우리 삼남매가 사회에서 가정에서 제 몫의 역할들을 하고 있는 것은, 그게 모두 그 종교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 엄마는 확신하고 있다.
엄마는 늘 나의 바람막이였고 우산이었다. 그런 엄마가 많이 늙으셨다. 이제는 외출할 때는 항상 지팡이를 찾고, 노인용 유모차를 끌고 나선다. 엄마와 나는 삼십 년의 나이 차이와 그 만큼의 세대차이만큼 생각의 차이가 크지만, 나는 엄마의 생각과 가치관을 존중해야 한다.
몇 년전 엄마는 노인정의 어느 할머니와 싸움이 있었다. 노인정에서 감투를 쓰고 있는 상대방 할머니를 비롯한 몇몇 할머니들의 노인정 회비와 외부 지원 물품들을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일들이 있었고, 엄마는 그런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상대방 할머니를 밀었고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할머니는 작은 엄살과 함께 병원에 며칠 동안 들어 눕는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노인정의 감투를 쓰신 할머니들은 모두 감투를 벗었고, 팔십의 엄마는 경찰서에 폭행 신고가 되어 그 할머니의 병원비와 벌금까지 물어내야만 했다.
엄마는 불의를 참지 않는다. 몸이 고되더라도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엄마의 팔십년 인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늘 스스로 극복해내는 방향을 선택한다. 어찌보면 엄마의 그런 모습이 엄마 스스로를 평생 가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했고, 풍족함으로부터 가깝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사건에 대해 엄마의 판단은 언제나처럼 올바른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엄마의 행동은 올바르지 못했다. 그날 저녁 엄마가 말했다.
“너는 좋겠다. 엄마가 있어서…”
평생 억척같이 살아온 엄마이지만, 엄마도 엄마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엄마의 엄마, 엄마의 아빠, 엄마의 남편이 필요했겠구나. 앞으로는 이 아들이 엄마의 바람막이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