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과제물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교과목명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학 과 생활과학부(식품영양학전공)
담당교수  
학 번 202333-360034
성 명 황상규
소속대학 서울지역대학(남부학습센터)
연락처  
과제유형 기말과제/공통
과제명 1. 교재를 참조하여 아래 문제에 대해 각각 서술해주세요( 2문제. 문제별 10. 20점 만점).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이육사의 작품과 항일운동의 동지였던 윤세주와의 관련성을 설명해주세요
<주의사항>
교재의 내용을 요약하는 문제입니다. 교재 이외의 자료는 참고하지 말아 주세요.
교재의 내용을 모두 적지 말고, 읽어보면서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자신의 글로 요약정리
문제당 제시된 분량 기준에 맞추어서 A4용지 반장(17~20) 정도로 작성
각 문제 답안 작성 후 참고한 교재 범위 적어주기 () 송찬섭 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1~5
2. 교재를 참고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주변 지역을 답사한 후 답사기를 작성해 주세요 (30). ※아래의 내용(①~⑤)을 반드시 포함하여 작성해 주세요.
답사지역 소개 : 답사지 선택 이유, 역사적 형성 과정, 지역명 형성 유래 등을 서술
답사 계획, 일정 : 언제 답사를 진행했는지, 답사 경로는 어떠했는지 적어줄 것. () 서대문구의 역사 유물, 유적지 3~4곳 선정. 선정된 곳의 답사 시기 및 경로 적어주기.
일정에 따라 답사한 유적, 유물 등에 대한 소개 및 소감
향후 답사해보고 싶은 지역과 이유 : 과제로 제출한 답사기 내용과 연관하여 작성
답사기 마지막에 답사를 다녀왔음을 증명하는 사진 첨부(사진은 답사기 분량에 포함되지 않음)
· 대도시일 때는 구, 동 등으로 범주를 축소하여 작성할 것.
() 서울 서대문구 답사. 서울 정동 답사. 인천 개항장 답사 등.
· 비도시지역은 해당 군, 면 소재지를 대상으로 할 것.
() 감포읍 적산가옥 길을 찾아서 등.
· 직접 조사, 경험한 내용이나 관람 및 답사를 통해 얻은 결과물을 중심으로 작성.
(단 필요에 따라 서적이나 인터넷 자료를 사용하여 보완 가능. 반드시 출처를 밝힐 것)
· 방문한 장소와 함께 손바닥, 표 등이 나온 사진 첨부 가능. 용량이 적은 사진 1장만 첨부
 (사진 용량 줄이는 예) 컴퓨터에 사진 파일을 연 후, 화면을 캡처함.
지시사항 - 표절 금지. 특정 블로그, 특정 사이트(위키디피아 및 사전 등)를 전제하는 경우 표절로 간주 합니다.
- 1번 문제 : 교재 이외의 자료를 참조하지 말아주세요. 교재 전체 장의 범위를 적지 말고, 요약한 부분의 범위를 적어주세요.
- 2번 문제는 역사 현장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현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점에 주 안점을 맞춰 주세요.
- 아래 한글, MS word, PDF 사용
- 총 분량 : 표지, 사진 제외한 A4용지 3~4(글자 크기 11point, 줄 간격 160%)
*1번 문제 : 문제별 A4용지 반장(17~20) A4 1~1.5,
2번 문제 A4 2~2.5
*분량은 표지와 사진을 제외한 답안 부분으로, 최대한 3~4매에 맞추도록 노력해주세요.
*기준 분량에 충족하지 않는 경우, 현저하게 많은 경우 점수 차감이 있습니다.
참고문헌 2021 7월 이후 발간 교재(송찬섭 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답사지역에 관한 저서, 논문, 해당 지역에 관한 사이트

 1. 교재를 참조하여 아래 문제에 대해 각각 서술해주세요(총 2문제. 문제별 10점. 20점 만점).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개성은 신라 후기까지는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이곳은 고구려의 부소갑인데, 신라 때 송악군으로 태조의 6대조인 호경이 처음으로 송악 일대에 정착했고, 그 후손들은 송악 일대에서 호족으로 성장했다. 896년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 귀부하고 898년 궁예가 송악군을 수도로 삼으면서 개성은 역사에 무대에 나서게 된다. 905년 궁예가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지만, 고려 태조가 고려 건국 후 다음 해인 919년 송악산의 남쪽인 송악군을 개주라 하고 고려왕조의 수도로 삼는다. 개경은 주요 시설들을 확충하고 960년 이름을 황도로 고치고 궁궐을 수리했다.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몽골과 전쟁 중에 수도를 강화로 옮겨졌고, 1270년 다시 개경으로 환도 후 주요 시설들을 재건하였다. 1361년 공민왕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적에게 내어주고 복주목(현재 안동시)까지 피난을 갔다. 1392 7월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개경 중심부에 있던 수창궁에서 즉위했고, 1394 10월 조선의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길 때까지 개경은 조선의 수도였다. 1399 3월에 정종은 수도를 개성으로 다시 옮기지만, 개성은 수도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1405 10월 태종은 수도를 다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개성을 개성부로 개편되면서 개성은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유수부로 그 위상이 정해졌다. 이후 개성부의 위상은 한성부와 분명히 구분되었고 개성은 상업 도시로서, 수도의 뒤를 지키는 군사도시로서, 사신 왕래가 빈번한 교통의 요지로서 그 위상을 지켜 나갔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311~313.

이육사의 작품과 항일운동의 동지였던 윤세주와의 관련성을 설명해주세요

1936 11 18일 이육사와 형제들이 이육사의 어머니 회갑연을 맞이하여 바친 빈풍칠월의 병풍이다. 이 병풍의 시는 시경에 수록되어 있는 시로 육사의 대표작 청포도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시가 새겨진 인장은 육사와 그의 혁명동지 석정 윤세주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고, 윤세주는 청포도에서 청포를 입고 오는 손님으로 등장한다. 윤세주는 1932 9월 윤세주와 함께 의열단의 본진이 있는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구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다. 이듬해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난징에 머무는데 이때 골동점에서 빈풍칠월이 새겨진 아름다운 비취 인장을 구입하여 애지중지했고 이 인장을 1933년 상하이에서 귀국하기 직전에 가진 최후의 만찬에서 “S에게 선물했다고 회고했다. “S”가 바로 석정 윤세주이다. 이 인장은 3년 선배이자 혁명동지인 석정 윤세주의 분투와 무강을 기원하는 징표가 되었다. 1939 8청포도를 발표하여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오는 해외 혁명가를 맞이할 향연을 준비하자 노래했다. 육사는 매년 석정 윤세주와 관련된 글을 썼다. 1939청포도를 비롯하여 시 교목”, 수필 연인기한시 주난흥여와 의열투쟁을 다짐하는 절정”, “등도 윤세주와 관련있다. 윤세주는 중죽에 남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42 6월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육사는 1944 1 16일 베이징의 일본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옥사했지만, 육사는 아름다운 고향과 혁명동지 윤세주를 노래하는 금강석 같은 시를 남겼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381~386.

 

2. 교재를 참고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주변 지역을 답사한 후 답사기를 작성해 주세요 (30). ※아래의 내용(①~⑤)을 반드시 포함하여 작성해 주세요.

(1) 답사지역 소개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서울 송파구에 위치해 있다. 직장을 이곳으로 옮기고 출퇴근을 위해 송파구에 원룸을 구해 주중에는 송파구민으로 지내고 있으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 대해서 궁금증을 풀고 답사해보는 것이 이 지역민으로써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옛이름 한수, 한성, 한양 등) 지역은 수천 수 만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특히 지금의 서울 강남(강남, 서초, 송파, 강동)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바다가 있고, 동쪽으로 높은 산이 있으며, 북쪽으로  큰 강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야가 있어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라는 것을 어릴 적 역사수업에서 많이 공부해왔다. 그러한 지역이기에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 서울지역을 차지했던 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었다.

삼국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터를 잡고 오랫동안 번성했던 나라는 백제였다. 비록 고구려에 의해 한강지역을 내주며 충청도 지역으로 쫓겨나고, 나중에는 신라에 의해 그 이름마저 사라져 멸망하기까지 백제의 문화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문화였다라고 전설처럼 미미하고 부족한 유물들로 추측되어오고 있다.

그 백제의 시작이었던 한성지역 그 중에서도 백제의 중심이었던 곳이 바로 이곳 서울 송파구지역이다. 송파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에서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이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백제시대 백제인들에 의해 건축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고, 백제의 고위 귀족 또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들인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 있다.

몽촌토성이 있던 지역이름은 원래 곰말이었다. 곰말은 꿈마을이라는 뜻이었고, 꿈을 뜻하는 과 마을을 뜻하는 으로 현재 몽촌토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 석촌동에 수많은 고분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4개의 고분만 보존되어 있는데, 예전부터 이 지역에는 고분에 사용했던 돌이 많아 돌이 많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석촌이라고 불리웠다.

 

(2) 답사계획

송파구에 위치한 백제시대 백제유물을 답사하기 위해 일요일 하루를 계획했다. 2024 11 17일 일요일. 낮기온이 영상 10도까지 떨어지는 서늘함이 느껴지던 오후에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혼자 지내고 있는 원룸에서 가장 가까운 기락시장역 지하철 8호선 을 탔다. 백제유물 유적지를 찾아가기는 쉽다. 지하철 8호선에 몽촌토성역이 있고,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천호역이 있는데 천호역과 병기되어 있는 이름은 풍납토성역이다. 또 몽촌토성역을 가기 두 정거장 이전에는 석촌역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제시대 고분 4기가 보존되어 있는 석촌고분군이 가까이 있다.

특히 몽촌토성역이 접해있는 곳은 올림픽 공원인데, 올림픽공원의 그 넒은 부지안에 몽촌토성이 자리잡고 있어서 몽촌토성은 주민들과 함께 즐김의 장소가 되어 있고, 같은 올림픽공원 부지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이 있어서 백제시대의 유물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한강지역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답사경로는 집에서부터 기장 먼 곳에서부터 풍납토성 -> 몽촌토성 -> 한성백제박물관 -> 석촌동 고분군을 들리는 계획하였다.

 

(3) 일정에 따라 답사한 유적, 유물 등에 대한 소개 및 소감

서울 지하철 8호선 천호역(병기역명 풍납토성”) 10번 출구으로 나와서 100미터쯤 걸어가면 대로변 왼쪽으로 작은 구릉이 보인다. 그곳이 풍납토성이다. 얼핏 보아서는 기다랗고 낮은 언덕처럼 보이기도 하다. 가까이 가보아도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서 나처럼 일부러 찾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곳이 백제의 토성이라는 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 다행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조금 더 지나서야 서울 풍납동 토성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풍납토성은 그 주위를 낮은 철조 담을 둘러놓아서 풍납토성을 더 가까이 다가 갈수도 올라설 수도 없다.

풍납토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초기 백제의 성곽이다.1925년 대홍수 때 중국제 청동자루솥을 비롯한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이 토성의 성격에 대해 왕성이라는 견해와 단지 방어성일 뿐이라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왔다. 1997년부터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왕궁 터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후 이 토성은 백제 시조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처음 도읍한 하남위례성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쌓아올린 판축 토성으로 너비 43m, 높이 11m이다. 원래는 둘레 3.5km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 2.1km 정도 남아있다.

다시 지하철역을 2정거장 되돌아오면 몽촌토성역이다. 서울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여의도과장보다 더 넓어 보이는 올림픽공원에 상징탑이 바로 앞이다. 그 안쪽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야 몽촌토성이 있다.

몽촌토성이 올림픽공원내에 있다보니 풍납토성과 달리 몽촌토성 위로 산책길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올레길 걷듯이 몽촌토성 위를 걸어다니고 있다. 유일하게 단 하나 발견한 몽촌토성 중간 오르막길 입구에 서있는 표지판이 아니라면 이 곳에 처음 와본 사람들에게는 단지 언덕위의 산책로일뿐처럼 이용되고 있다.

백제의 남쪽 왕성인 몽촌토성은 강력한 고대국가 백제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원래 이 곳은 곰말다라고 불리웠다. 곰말은 우리말로 꿈마을이며 한자로 표현하면 몽촌이 된다. 이러한 지명에서 유래한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같이 판축기법을 일부 사용했지만, 주로 남한산의 산줄기와 한강변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백제의 왕성이었다.

왕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었다면, 왕이나 귀족 들의 무덤도 있을 것이니 송파구에는 방이동 고분군과 석촌동 고분군이 유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고 하여 서울 석촌동 고분군을 찾아가기 위해 역시 지하철 8호선을 다시 타고 석촌역에 내렸다. 석촌역 7번출구에서 내려 서쪽으로 400미터쯤 대로를 따라 걷다보면 대로를 가로막고 있는 공원이 있다. 그곳이 석촌동 고분군 공원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돌무지무덤이다. 1916년에는 90여 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덤은 없어지고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이곳의 돌무지무덤은 외형에서는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돌무지무덤과 같지만 내부 구조에서는 서로 다르다. 3호 돌무지무덤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와 남은 1호 돌무지무덤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남쪽 무덤은 고구려식이고 북쪽 무덤은 백제식이다. 3호 돌무지 무덤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4) 향후 답사해보고 싶은 지역과 이유

백제가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은 내가 답사했던 한성지역이고, 그 곳에 위례성을 세웠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위례성의 일부이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산업화의 과정속에서 아파트와 빌딩 숲에 공존하기에는 원형 그대로 보존 되어지지 못하고 고증과 복원을 통해 1600년전 초기 백제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현대적 위엄을 갖추고 있어서 무척 아쉬웠다.

유물, 유적이라면 당연히 쓰려져가는 낡은 모습이어야 하는데, 너무나 현대적으로 너무나 관리가 잘 되고 있어서, 이곳이 과연 그곳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백제는 고구려에 쫓기고 신라에 밀려 한성(위례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로 그 뒤로는 다시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천도하게 되었으니, 이번 답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원형 그대로를 상상할 수 있는 백제의 본 모습을 기대해보려면 백제의 두번째 세번째 도읍인 공주와 부여를 꼭 방문해보고 싶다.

백제의 두번째 도읍이었던 웅진(지금의 공주)에는 백제 왕릉의 최고로 남아있는 무령왕릉이 있으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빛 찬란한 유물들을 가슴속 깊이 경건한 마음으로 느껴보고 싶다. 또 백제의 세번째 도읍이었던 사비(지금의 부여)에는 서울 송파구에 잔존해있는 석촌동 고분군이나 방이동 고분군에 비할 바가 아닌 그 수와 웅장함에 압도되는 많은 고분들이 있으니, 그 웅장함에 매료되어보고 싶다.

 

(5) 답사기 마지막에 답사를 다녀왔음을 증명하는 사진 첨부

 

Posted by 우라질레이터

urajilati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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