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과제물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교과목명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
학 과 | 생활과학부(식품영양학전공) |
담당교수 | |
학 번 | 202333-360034 |
성 명 | 황상규 |
소속대학 | 서울지역대학(남부학습센터) |
연락처 | |
과제유형 | 중간과제/공통 |
과제명 | 아래 문제에 대해 각각 서술해주세요(총 5문제. 문제별 6점. 총 30점 만점). ※ 문제 답안 작성에 활용한 참고 자료를 문제별로 표기할 것(과제 작성 시 지시사항 내용 참조). ⑴ 고구려가 산성을 축조한 이유와 고구려 산성의 군사적 방어 기능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⑵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구성과 문화교류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⑶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삶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⑷ 이순신의 두 차례 백의종군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⑸ 최부가 기록한 표해록의 간행과 내용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
지시사항 | ▶ 아래 내용에 맞추어서 작성해주세요. 과제물 답안 작성 기준이므로, 어긋나는 경우 일정한 점수 차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과제물 출제의 목적 : 이번 중간과제물의 목적은 문제에 해당하는 교재의 내용을 확인하고, 이를 정해진 분량(A4용지 반매 17~20줄)으로 각각 요약을 하는 데 있습니다. 2. 서술형으로 작성해주세요. 서술형 답안은 문장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3. 반드시 교재를 보시고 요약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본 과제물의 목적은 ①교재를 읽고, ②문 제의 내용 및 출처를 찾고, ③요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재가 아닌 인터넷, 저서, 논문을 사용하 지 말아 주세요. 교재는 지역대학, 학습관 도서관에 모두 비치되어 있습니다. 구매가 어려우실 경 우 적극적으로 지역대학과 학습관의 도서관을 활용해주세요. 4. 각 문제를 서술하신 후 참고하신 교재의 쪽수를 적어주세요. 문제 별로 답안을 작성하신 후 참 고하신 교재의 범위를 적어주셔야 합니다. ① 각 장의 문제에 해당하는 부분의 범위를 적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7~20쪽. ② 문제에 해당하는 전체 장의 범위를 적지 마시고 참조하신 부분을 적어주세요. ③ 참조하신 부분 쪽수를 모두 적지 마시고, 활용하신 부분의 범위를 적어주세요. (잘못된 예)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7쪽, 18쪽, 19쪽, 20쪽 (올바른 예)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7~20쪽. ④ 요약은 반드시 교재 본문 내용을 읽고 적어주세요. 워크북과 교재 말미 요약은 참고용입니다. 5. 교재를 그대로 전제하지 말고 이해한 내용을 학우님들께서 직접 정리해주세요. 6. 분량 및 작성 : ① A4용지 기준 ② 한글과 컴퓨터, PDF, MS워드 작성 가능 ③ 한글과 컴퓨터 : 글자 크기 11point, 줄 간격 160%, / MS워드 : 글자 크기 10point, 기본 여백 ④ 분량 : 각 문제 당 A4 반매(17~20줄) / 총 2.5~3매(표지 제외) 작성(최대한 분량을 맞추도록 노력해주세요) |
참고문헌 | 2021년 7월 이후 발간 교재(송찬섭 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
⑴ 고구려가 산성을 축조한 이유와 고구려 산성의 군사적 방어 기능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요동이라는 지명은 중국 대륙의 왕조 기준으로 “먼 동쪽”이라는 뜻이다. 통상 요동은 요하를 기준으로 동쪽 땅을 가리키지만, 대략 지금의 요동반도와 요하 상류 동요하 및 혼하 중상류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른바 만주 지역을 근거로 하는 동방세력과 중국 세력이 접촉하는 지대인 요동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양 세력의 향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동북아시아 세력 판도를 뒤바꾸는 중국 세력과 동방 세력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고구려의 멸먕, 신라의 삼국통합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그런 역사적 전쟁의 주요 무대인 요동 땅을 지키기 위해서 고구려인들이 곳곳에 산성을 구축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산성은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함으로써 공력을 적게 들이고도 성벽이 갖는 방어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대 시킬 수 있었다. 산성은 성곽이 위치한 지세에 따라 여러 분류 방식이 있으나, 통상 포곡식 산성과 산정식 산성, 이를 혼합한 복합식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산성은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체계적인 국가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다. 요동 지역의 지리 형세를 보면 최전선에 요하가 있으며, 그 뒤편으로 평야 지대가 펼쳐지고 그 뒤편에 천산산맥이 요동반도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천산산맥에서 발원하는 여러 지천은 요하로 흘러 들어가며, 이 하천들이 교통로로 활용된다. 이들 교통로를 이용하여 천산산택을 넘어야 압록강에 이르게 된다. 고구려는 이러한 요동의 지리적 형세를 이용하여 독특한 산성 방어망을 구축했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7~19쪽.
⑵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구성과 문화교류에 관하여 서술해주세요.
오늘날의 한류는 조선통신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과거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알리고 교감했던 조선통신사와 그들의 행렬은 한류의 원조 격이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 사행을 이끌 3사를 필두로 약 300~4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조선통신사에 선발된 인원은 사절단의 책임자인 3사를 비롯하여 임무와 역할에 따라 상상관, 상판관, 학사, 상관, 차관, 중관, 하관으로 구분하여 편성되었다.
통신사 사행단을 대표하는 책임자인 3사는 학식이 높고 시문에 뛰어난 고위 관리들이 선발되었다. 통신사가 지나는 연도에는 이들의 시문을 받고 교류하고자 하는 일본의 지식인이 많았다.
제술관과 서기는 나라 안에서 시와 문장으로 이름 있는 인재들이 선발되었다. 서도로서 조선의 문풍을 전파했던 이들이 있고, 사자관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문서를 옮겨 적는 역할을 담당했다.
자제군관은 삼사의 자네나 친인척 중에서 선발하여 외국의 문물을 경험시키기 위해 데려갔다. 자제군관들은 명목상 통신사의 호위격으로 참여하지만, 시문에 뛰어난 사람이 선발되었으므로 문화 교류에 일조했다.
통역을 담당했던 통사와 훈도는 언어를 통하여 자국의 문화를 타 문화로 전수하는 매개자로서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훈도는 비록 지위는 낮았지만,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일행보다 뛰어났다.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사행에 참여한 의원, 화원, 마상재인은 조선 문화의 진수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화원은 도화서에 소속된 화가였으며, 통신사가 가는 곳의 정경이나 의례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이다.
통신사 행렬도에 머리를 땋지 않은 아이들은 통신사 일행이 데리고 간 소동이다. 이들은 춤이나 노래 등으로 일행의 무료함을 달래 주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의 우시마도에는 당시 소동들이 추었다고 여겨지는 “가리코 오도리”가 전해기고 있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45~48쪽.
⑶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삶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고려 중기의 문인이자 관리였던 이규보는 29세때인 1196년 수도 개경을 떠나 여주와 상주를 어행하고 “남유시”를 남겼다. 이규보는 많은 글을 남긴 문인이었을 뿐 아니라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 고위 관리이기도 했다. 그가 성장하고 활동하던 고려 무인집권기에 이규보의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가 중앙관리로 진출하기 전까지는 황려현(현재의 여주시)에서 대대로 향리직을 세습하였다.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나 주목을 받았지만, 22세때 당시 과거 1차시험격인 국자감시에 수석 합격했는데, 네번째 응시한 결과였고, 처음 응시 후 6년만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 이규보는 과거 본시험인 예부시에서 동진사로 급제했다.
24세 때 개경 북쪽에 있는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라 칭하기도 했고 천마산에 있으면서 거문서, 술, 시를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이라는 호를 짓기로 했다. 26세 때 개경으로 돌아와 관직에 나가려고 애써지만, 끝내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동명왕편”을 저술했다.
.29세때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으며 이른바 “최시집권기”가 시작되었으면 이규보는 매형이 귀향을 가게된 지역인 여주와 어머니가 있는 상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32세 때 최충헌의 의해 과거 급제후 9년만에 전주목의 사록겸장서기로 임명되었었지만, 1년여만에 파직되어 관직없이 지내다가 40세에 직한림원이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48세에 종6품의 우정언 지제고가 되어 본격적인 문한관이 되었다. 위도에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65세 때에 복직했지만, 수도가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지면서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 그 후 순조롭게 승진하여 종1품이라는 최고의 관직으로 은퇴했고 은퇴한지 4년 후인 1241년 6월 74세 나이에 강도에서 세상을 떠나 강화도 진강산 남쪽에 묻혔다. 그해 12월 문집 “동국이상국문집”이 간행되었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49~151쪽.
⑷ 이순신의 두 차례 백의종군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이순신의 1차 백의종군은 1587년 함경도 경흥도호부의 조산보 만호(종4품 무관직) 겸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고 있을 때,.여진족이 녹둔도의 식량을 탈취하기 위하여 기습적으로 침입하면서 발생했다. 이때 벌어진 전투로 조선 측에서는 군인 열한 명이 전사하고 백성 160여명이 잡혀가는 큰 피해를 입었따. 함경도 북병사 이일은 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지휘관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보 만호 이순신을 하옥하고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했다. 하지만, 선조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으니 장형을 집행한 다음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게하라는 명을 니렸다. 이순신은 이듬해 1월 여진족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벗어나며 복권되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인 1593년 4월부터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강화협상은 1596년 9월에 이르러 결렬되고, 1597년 정유년 일본의 재침, 즉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이순신은 2차 백의종군을 당했다.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전라도 침략전쟁으로 전개하는데,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출동하여 일본군을 맞아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함부로 출전할 수 없다는 장계를 올리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이 명령불복종 사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한산도 통제영에서 체포된 이순신은 한양 의금부에 투옥되고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판중추부사 정탁의 신구차 등 여러 사람의 석방 탄원과 구명운동에 힘입어 목숨을 구하게 되고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의 백의종군을 명 받는다. 의금부에 투옥된지 27일만에 출옥하여 도원수 군영이 있던 경남 합천으로 백의종군 길에 올랐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까지 1597년 4월 1일부터 8월 3일까지 2차 백의종군을 하였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75~176쪽.
⑸ 최부가 기록한 “표해록”의 간행과 내용에 관하여 설명해주세요.
최부는 조선 성종과 연산군 시기의 문신으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성리학 공부를 하여 초시를 거쳐 25세(1478년 성종 9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는 제주3읍 추쇄경차로 부임하기 위해 1487년 11월 11일 전라도 해남 관두량 포구에서 관선을 타고 제주에 부임했다가 이듬해 1488년 1월 30일 고향 나주의 부친상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가던 중 바다 위를 표류하게 되었고, 14일만인 1월 16일 중국 전강성에 표착했으나 해안을 침범한 왜구로 오인받아 관아로 이송되었다. 언어는 소통되지 않았지만, 필담으로 관원들을 설득하고 왜구 혐의를 벗으며 조선 관리로서의 신분을 확인받게 되었다. 이후 왜구가 아닌 조선인 표류자로 신원을 회복한 최부 일행은 명나라의 송환 절차에 따라 중국의 경항대운하 구간을 이용해 북경으로 이송되었고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고 요동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함으로써 중국 체류 135일 동안 중국 각 지역을 경유하며 조선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최부의 표해록은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남해 바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한반도 서남단에서 남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최부가 중국의 관리, 문인을 만나 필담으로 조선 문인의 지적 자부심을 드러내는 대목도 있다. 표해록은 . 해로, 기후, 산천, 도록, 관부, 운하와 제방, 갑문과 고적은 물론 강남과 강북의 풍속, 민요 등 방대한 양의 중국 풍토 기록을 담고 있다. 특히 표해록에는 수차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조선으로 귀환이후에 1496년 가뭄이 들자 수차 제작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처럼 표해록은 최부의 사람됨과 성리학자로서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면서, 나아가 15세기 명나라 사회 문화의 일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236~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