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NA 백신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로 2023년 노벨상을 받은 커리코와 와이스만 두 사람의 연구와 그 응용 성과에 대해 조사하시오. (분량 3600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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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mRNA 백신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로 2023년 노벨상을 받은 커리코와 와이스만 두 사람의 연구와 그 응용 성과에 대해 조사하시오.)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독일의 바이오엔테크 부사장인 커리코 커털린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인 드루 와이스먼이 수상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유행하여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던 때에 그나마 그 힘들었던 시기를 그 정도에서 극복해낼 수 있었던 것은 두 과학자의 연구 덕분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mRNA(메신저RNA) 백신 개발이 빠르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노벨 위원회가 밝힌 이 같은 수상 이유는 “코로나19에 효과적인 mRNA 백신 개발을 가능케 한 뉴클레오사이드 염기 변형에 관한 발견”이다.
RNA가 외부에서 인체에 들어오면 다양한 염증 사이토카인(면역신호 전달에 쓰이는 작은 단백질)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침입한 RNA를 파괴하고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을 억제하는 우리 몸을 외부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지키는 선천면역반응이 작동하는데, 백신처럼 RNA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에 대한 특이적인 면역반응을 유도하거나, 발현된 단백질 자체를 유전자 치료 교정용 단백질이나 항체로 사용하는 경우 등에는 이러한 선천면역반응을 회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천면역반응의 핵심은 외부에서 들어온 RNA를 인식하는 인체의 패턴인식수용체인 TLR(toll-like receptor)인데, 외부 RNA에 의해 활성화된 TLR은 선천면역반응을 활성화 시켜 다양한 염증 사이토카인을 유도하고 RNA를 주형으로 하는 단백질 발현을 억제한다.
커리코 커털린와 드루 와이스먼은 2005년 논문에서 tRNA(운반RNA)가 이러한 선천면역반응을 유도하지 않고이러한 tRNA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변형된 뉴클레오사이드에 특별한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변형된 뉴클레오사이드를 사용해 mRNA를 만들면 인체에 투입했을 때 염증 사이토카인 발현이 낮아지고 단백질 발현 효율이 증가했는데, 이는 외부 RNA에 의해 유도되는 선천면역반응을 회피하고 필요한 단백질, 백신 면역반응을 유도해야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스파이크 단백질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원리를 발견한 커리코 커털린와 드루 와이스먼은 논문을 바탕으로, 모더나와 화이자는 mRNA를 구성하는 네 가지 염기 중 우리딘(U)을 사용하지 않고 메틸슈도유리딘을 활용해 mRNA 백신을 제작했다.
바이러스 백터 등 기존 방식의 백신 개발은 짧게 5년에서 10년까지 걸린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모더나와 화이자는 mRNA 방식의 코로나19 백신을 바이러스 유전자 정보를 확보한 지 10개월 만에 개발되었다. 이 외에도 mRNA 백신은 다른 백신처럼 대규모 생산 설비가 필요 없어서, mRNA 생산 설비는 간단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 모두 들어갈 정도로 단순하며, 더구나 안전성과 효과도 다른 백신과 동등하거나 우수한 것이 밝혀졌다.
이들이 논문을 통해, 변형된 뉴클레오사이드 활용으로 mRNA를 합성해 선천 면역반응을 피하고, 안정성을 높이는 기술을 처음으로 고안해 내어, mRNA 기술의 한계를 극복한 덕분에 전세계적으로 백신을 개발해 보급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 mRNA백신이 새로운 질병과 싸우는 새로운 플랫폼이 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mRNA 기반 다양한 치료제 개발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게 되었고, 감염병 예방 백신 이외에 암 백신으로의 활용 가능성도 높아서, 이미 mRNA 기반 피부암 등 암 백신 개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되게 되었다.
1. 교재를 참조하여 아래 문제에 대해 각각 서술해주세요(총 2문제. 문제별 10점. 20점 만점). ⑴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⑵ 이육사의 작품과 항일운동의 동지였던 윤세주와의 관련성을 설명해주세요 <주의사항> ① 교재의 내용을 요약하는 문제입니다. 교재 이외의 자료는 참고하지 말아 주세요. ② 교재의 내용을 모두 적지 말고, 읽어보면서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자신의 글로 요약정리 ③ 문제당 제시된 분량 기준에 맞추어서 A4용지 반장(17~20줄) 정도로 작성 ④ 각 문제 답안 작성 후 참고한 교재 범위 적어주기 (예) 송찬섭 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1~5쪽 2. 교재를 참고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주변 지역을 답사한 후 답사기를 작성해 주세요 (30점). ※아래의 내용(①~⑤)을 반드시 포함하여 작성해 주세요. ① 답사지역 소개 : 답사지 선택 이유, 역사적 형성 과정, 지역명 형성 유래 등을 서술 ② 답사 계획, 일정 : 언제 답사를 진행했는지, 답사 경로는 어떠했는지 적어줄 것. (예) 서대문구의 역사 유물, 유적지 3~4곳 선정. 선정된 곳의 답사 시기 및 경로 적어주기. ③ 일정에 따라 답사한 유적, 유물 등에 대한 소개 및 소감 ④ 향후 답사해보고 싶은 지역과 이유 : 과제로 제출한 답사기 내용과 연관하여 작성 ⑤ 답사기 마지막에 답사를 다녀왔음을 증명하는 사진 첨부(사진은 답사기 분량에 포함되지 않음) · 대도시일 때는 구, 동 등으로 범주를 축소하여 작성할 것. (예) 서울 서대문구 답사. 서울 정동 답사. 인천 개항장 답사 등. · 비도시지역은 해당 군, 면 소재지를 대상으로 할 것. (예) 감포읍 적산가옥 길을 찾아서 등. · 직접 조사, 경험한 내용이나 관람 및 답사를 통해 얻은 결과물을 중심으로 작성. (단 필요에 따라 서적이나 인터넷 자료를 사용하여 보완 가능. 반드시 출처를 밝힐 것) · 방문한 장소와 함께 손바닥, 표 등이 나온 사진 첨부 가능. 용량이 적은 사진 1장만 첨부 (사진 용량 줄이는 예) 컴퓨터에 사진 파일을 연 후, 화면을 캡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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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2021년 7월 이후 발간 교재(송찬섭 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답사지역에 관한 저서, 논문, 해당 지역에 관한 사이트
1. 교재를 참조하여 아래 문제에 대해 각각 서술해주세요(총 2문제. 문제별 10점. 20점 만점).
⑴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개성은 신라 후기까지는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이곳은 고구려의 부소갑인데, 신라 때 송악군으로 태조의 6대조인 호경이 처음으로 송악 일대에 정착했고, 그 후손들은 송악 일대에서 호족으로 성장했다. 896년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 귀부하고 898년 궁예가 송악군을 수도로 삼으면서 개성은 역사에 무대에 나서게 된다. 905년 궁예가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지만, 고려 태조가 고려 건국 후 다음 해인 919년 송악산의 남쪽인 송악군을 개주라 하고 고려왕조의 수도로 삼는다. 개경은 주요 시설들을 확충하고 960년 이름을 황도로 고치고 궁궐을 수리했다. 1232년부터 1270년까지몽골과 전쟁 중에 수도를 강화로 옮겨졌고, 1270년 다시 개경으로 환도 후 주요 시설들을 재건하였다. 1361년 공민왕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적에게 내어주고 복주목(현재 안동시)까지 피난을 갔다. 1392년 7월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개경 중심부에 있던 수창궁에서 즉위했고, 1394년 10월 조선의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길 때까지 개경은 조선의 수도였다. 1399년 3월에 정종은 수도를 개성으로 다시 옮기지만, 개성은 수도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1405년 10월 태종은 수도를 다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개성을 개성부로 개편되면서 개성은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유수부로 그 위상이 정해졌다. 이후 개성부의 위상은 한성부와 분명히 구분되었고 개성은 상업 도시로서, 수도의 뒤를 지키는 군사도시로서, 사신 왕래가 빈번한 교통의 요지로서 그 위상을 지켜 나갔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311~313쪽.
⑵ 이육사의 작품과 항일운동의 동지였던 윤세주와의 관련성을 설명해주세요
1936년 11월 18일 이육사와 형제들이 이육사의 어머니 회갑연을 맞이하여 바친 “빈풍칠월”의 병풍이다. 이 병풍의 시는 시경에 수록되어 있는 시로 육사의 대표작 “청포도”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시가 새겨진 인장은 육사와 그의 혁명동지 석정 윤세주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고, 윤세주는 “청포도”에서 “청포를 입고 오는 손님”으로 등장한다. 윤세주는 1932년 9월 윤세주와 함께 의열단의 본진이 있는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구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다. 이듬해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난징에 머무는데 이때 골동점에서 “빈풍칠월”이 새겨진 아름다운 비취 인장을 구입하여 애지중지했고 이 인장을 1933년 상하이에서 귀국하기 직전에 가진 “최후의 만찬”에서 “S에게 선물했다”고 회고했다. 이 “S”가 바로 석정 윤세주이다. 이 인장은 3년 선배이자 혁명동지인 석정 윤세주의 분투와 무강을 기원하는 징표가 되었다. 1939년 8월 “청포도”를 발표하여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오는 해외 혁명가를 맞이할 향연을 준비하자 노래했다. 육사는 매년 석정 윤세주와 관련된 글을 썼다. 1939년 “청포도”를 비롯하여 시 “교목”, 수필 “연인기” 한시 “주난흥여”와 의열투쟁을 다짐하는 “절정”, “꽃” 등도 윤세주와 관련있다. 윤세주는 중죽에 남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42년 6월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의 일본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옥사했지만, 육사는 아름다운 고향과 혁명동지 윤세주를 노래하는 금강석 같은 시를 남겼다.
(출처) 송찬섭 외 공저,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381~386쪽.
2. 교재를 참고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주변 지역을 답사한 후 답사기를 작성해 주세요 (30점). ※아래의 내용(①~⑤)을 반드시 포함하여 작성해 주세요.
(1) 답사지역 소개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서울 송파구에 위치해 있다. 직장을 이곳으로 옮기고 출퇴근을 위해 송파구에 원룸을 구해 주중에는 송파구민으로 지내고 있으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 대해서 궁금증을 풀고 답사해보는 것이 이 지역민으로써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옛이름 한수, 한성, 한양 등) 지역은 수천 수 만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특히 지금의 서울 강남(강남, 서초, 송파, 강동)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바다가 있고, 동쪽으로 높은 산이 있으며, 북쪽으로 큰 강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야가 있어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라는 것을 어릴 적 역사수업에서 많이 공부해왔다. 그러한 지역이기에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 서울지역을 차지했던 나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었다.
삼국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터를 잡고 오랫동안 번성했던 나라는 백제였다. 비록 고구려에 의해 한강지역을 내주며 충청도 지역으로 쫓겨나고, 나중에는 신라에 의해 그 이름마저 사라져 멸망하기까지 백제의 문화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문화였다라고 전설처럼 미미하고 부족한 유물들로 추측되어오고 있다.
그 백제의 시작이었던 한성지역 그 중에서도 백제의 중심이었던 곳이 바로 이곳 서울 송파구지역이다. 송파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에서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이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백제시대 백제인들에 의해 건축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고, 백제의 고위 귀족 또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들인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 있다.
몽촌토성이 있던 지역이름은 원래 “곰말”이었다. 곰말은 “꿈마을”이라는 뜻이었고, 꿈을 뜻하는 “몽”과 마을을 뜻하는 “촌”으로 현재 몽촌토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석촌동에 수많은 고분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4개의 고분만 보존되어 있는데, 예전부터 이 지역에는 고분에 사용했던 돌이 많아 “돌이 많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석촌”이라고 불리웠다.
(2) 답사계획
송파구에 위치한 백제시대 백제유물을 답사하기 위해 일요일 하루를 계획했다. 2024년 11월 17일 일요일. 낮기온이 영상 10도까지 떨어지는 서늘함이 느껴지던 오후에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혼자 지내고 있는 원룸에서 가장 가까운 기락시장역 지하철 8호선 을 탔다. 백제유물 유적지를 찾아가기는 쉽다. 지하철 8호선에 “몽촌토성역”이 있고,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천호역이 있는데 천호역과 병기되어 있는 이름은 “풍납토성역”이다. 또 몽촌토성역을 가기 두 정거장 이전에는 “석촌역”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제시대 고분 4기가 보존되어 있는 석촌고분군이 가까이 있다.
특히 몽촌토성역이 접해있는 곳은 올림픽 공원인데, 올림픽공원의 그 넒은 부지안에 몽촌토성이 자리잡고 있어서 몽촌토성은 주민들과 함께 즐김의 장소가 되어 있고, 같은 올림픽공원 부지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이 있어서 백제시대의 유물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한강지역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서울 지하철 8호선 천호역(병기역명 “풍납토성”) 10번 출구으로 나와서 100미터쯤 걸어가면 대로변 왼쪽으로 작은 구릉이 보인다. 그곳이 풍납토성이다. 얼핏 보아서는 기다랗고 낮은 언덕처럼 보이기도 하다. 가까이 가보아도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서 나처럼 일부러 찾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곳이 백제의 토성이라는 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 다행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조금 더 지나서야 “서울 풍납동 토성”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풍납토성은 그 주위를 낮은 철조 담을 둘러놓아서 풍납토성을 더 가까이 다가 갈수도 올라설 수도 없다.
풍납토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초기 백제의 성곽이다.1925년 대홍수 때 중국제 청동자루솥을 비롯한 중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이 토성의 성격에 대해 왕성이라는 견해와 단지 방어성일 뿐이라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왔다. 1997년부터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왕궁 터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후 이 토성은 백제 시조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처음 도읍한 하남위례성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쌓아올린 판축 토성으로 너비 43m, 높이 11m이다. 원래는 둘레 3.5km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 2.1km 정도 남아있다.
다시 지하철역을 2정거장 되돌아오면 몽촌토성역이다. 서울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여의도과장보다 더 넓어 보이는 올림픽공원에 상징탑이 바로 앞이다. 그 안쪽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야 몽촌토성이 있다.
몽촌토성이 올림픽공원내에 있다보니 풍납토성과 달리 몽촌토성 위로 산책길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올레길 걷듯이 몽촌토성 위를 걸어다니고 있다. 유일하게 단 하나 발견한 몽촌토성 중간 오르막길 입구에 서있는 표지판이 아니라면 이 곳에 처음 와본 사람들에게는 단지 언덕위의 산책로일뿐처럼 이용되고 있다.
백제의 남쪽 왕성인 몽촌토성은 강력한 고대국가 백제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원래 이 곳은 곰말다라고 불리웠다. 곰말은 우리말로 꿈마을이며 한자로 표현하면 몽촌이 된다. 이러한 지명에서 유래한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같이 판축기법을 일부 사용했지만, 주로 남한산의 산줄기와 한강변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백제의 왕성이었다.
왕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었다면, 왕이나 귀족 들의 무덤도 있을 것이니 송파구에는 방이동 고분군과 석촌동 고분군이 유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고 하여 서울 석촌동 고분군을 찾아가기 위해 역시 지하철 8호선을 다시 타고 석촌역에 내렸다. 석촌역 7번출구에서 내려 서쪽으로 400미터쯤 대로를 따라 걷다보면 대로를 가로막고 있는 공원이 있다. 그곳이 석촌동 고분군 공원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돌무지무덤이다. 1916년에는 90여 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덤은 없어지고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이곳의 돌무지무덤은 외형에서는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돌무지무덤과 같지만 내부 구조에서는 서로 다르다. 3호 돌무지무덤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와 남은 1호 돌무지무덤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남쪽 무덤은 고구려식이고 북쪽 무덤은 백제식이다. 3호 돌무지 무덤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4) 향후 답사해보고 싶은 지역과 이유
백제가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은 내가 답사했던 한성지역이고, 그 곳에 위례성을 세웠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위례성의 일부이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산업화의 과정속에서 아파트와 빌딩 숲에 공존하기에는 원형 그대로 보존 되어지지 못하고 고증과 복원을 통해 1600년전 초기 백제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현대적 위엄을 갖추고 있어서 무척 아쉬웠다.
유물, 유적이라면 당연히 쓰려져가는 낡은 모습이어야 하는데, 너무나 현대적으로 너무나 관리가 잘 되고 있어서, 이곳이 과연 그곳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백제는 고구려에 쫓기고 신라에 밀려 한성(위례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로 그 뒤로는 다시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천도하게 되었으니, 이번 답사에서 가장 아쉬웠던 원형 그대로를 상상할 수 있는 백제의 본 모습을 기대해보려면 백제의 두번째 세번째 도읍인 공주와 부여를 꼭 방문해보고 싶다.
백제의 두번째 도읍이었던 웅진(지금의 공주)에는 백제 왕릉의 최고로 남아있는 무령왕릉이 있으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빛 찬란한 유물들을 가슴속 깊이 경건한 마음으로 느껴보고 싶다. 또 백제의 세번째 도읍이었던 사비(지금의 부여)에는 서울 송파구에 잔존해있는 석촌동 고분군이나 방이동 고분군에 비할 바가 아닌 그 수와 웅장함에 압도되는 많은 고분들이 있으니, 그 웅장함에 매료되어보고 싶다.
1. 교재와 강의 8장을 공부하고 불교의 특징을 서술합니다. (A4 용지 1페이지)(20점) 2. 교재와 강의 9장을 공부하고 핵심내용을 서술합니다. (A4 용지 1페이지)(10점) 3. 교재와 강의 12장을 공부하고 핵심내용을 서술합니다. (A4 용지 1페이지)(2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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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세계의종교, 안신,류성민, 출판문화원, 2014년
1. 교재와 강의 8장을 공부하고 불교의 특징을 서술합니다.
제 8 장 불교의 세계관과 역사
불교는 인도에서 약 2,500년전인 기원전 6세기경에 출현했고,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1,600년도 더 되었으며 유교와 더불어 한국의 전통종교로 여겨지며 우리나라 인구의 22.8%가 불교 신자이다. 불교는 이슬람교와 더불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출현했고 전기 힌두교로 불리는 브라흐마이즘이 지배하던 곳에서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종교로 힌두교의 주요 신념이나 관행을 수용한 것도 있고 거부한 것도 있다. 불교는 발생지인 인도보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더 융성해졌는데 불교는 전파 지역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는데 동남아시아에서는 소승불교로 동복아시아에서는 대승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불교는 힌두교에 버금가는 다양성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무수히 많은 경전들이 사용되고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종파와 교파도 생겨나 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지금의 네팔 남부 히말라야 산맥 아래 왕국의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타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가르치면서 시작된 종교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을 하여 마침내 윤회의 끝을 경험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어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의 “붓다” 혹은 우리말로 “부처”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을 설법이라고 하는데 네 가지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의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이다. “고성제” 삶 자체가 괴로움이다. “집성제” 고통의 원인은 욕망 혹은 갈망 때문이다. “멸성제” 고통의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도성제”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는 길이 있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없앰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팔정도를 통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욕망을 없애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음으로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하여 여덟가지 올바른 길이란 뜻을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승불교는 승려 중심의 불교이고 승려를 존중하는 것은 승려와 같이 세속의 모든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으며, 열반의 직전까지 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인 아르하트(아라한 혹은 나한)가 되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 것에 몰두하기 위해 잠시나마 승려생활을 하고자 한다. 대승불교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나 열반에 이르지 않고 많은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존재인 보살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본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최고의 윤리적 덕목은 자비로 보살의 이타정신인 것이다. 티베트 불교는 독특한 의례와 수행법, 활불신앙, 그리고 천장이라는 장례의식의 독특한 특징을 있다.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가 중복에 합병되기 전까지 정교일치적인 체제를 지니고 있었고, 주요 사원들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관할 지역의 중심역활을 했었다. 그중에서 황모파의 경우 최고 지도자를 달라이라마라고 하며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숭상된다. 현재의 제14대 달라이라마는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된 후 인도로 망명했고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며 활동하고 있다.
2. 교재와 강의 9장을 공부하고 핵심내용을 서술합니다.
제9장 자이나교, 시크교, 바하이신앙의 세계관과 역사
자이나교는 기원전 6세기 인도 동북부에서 마하비라에 의해 창시된 생명에 대한 극단적인 존중과 아힘사(불살생 또는 비폭력) 그리고 철저한 금욕생활 등을 이상으로 삼는다. 인도에 온몸을 흰 옷으로 가리고 마스크를 쓴 여인이나 나체로 수행하는 예외없이 자이나교 신자이며 약 500만 명의 신자가 있으나 인도 이외의 지역에는 크게 전파되지 않았다. 자이나교의 실천은 오계로 정리되는데, 어떤 생명체에게도 상해를 주거나 죽이지 않는 것, 진리만을 말하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지 않는 것,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훔치거나 갈취하지 않는 것, 성적인 욕망을 절제하는 것, 무소유 혹은 재산에 대한 비집착이 그것이다. 이 오계중에서도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아힘사라고 하고 가장 중요시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 신이나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 창시자인 마하비라를 비롯한 24명의 “고통의 바다를 건너 해탈의 길을 보여준 이”라는 뜻의 티르탄카라 사실상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시크교의 창시자는 나나크(1469~1539)으로 현재 파키스탄의 펀자브 주에서 크샤트리아 계층으로 태어나 신을 만나는 체험을 한 후 시크교를 창시했다. 시크라는 말은 제자 혹은 학습자라는 뜻으로 나나크를 비롯하여 9명의 후계자를 구루 곧 스승으로 불렀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시크이다. 시크교의 가르침은 이슬람적인 내용과 힌두교적인 내용이 복합되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종교적 신념은 유일신관이다. 시크교에서는 사회사업과 도덕적인 생활이 종교적 신념으로 확립되어 카스트 신분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형제애로 감싸고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며 거짓과 성적 방종에 빠지지 말 것을 가르친다. 또한 시크교 신자들은 용맹스러운 군인이나 헌신적인 교사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시크교도들은 머리카락과 수염은 자르지 않고 기를 것, 빗을 가지고 다닐 것, 짧은 바지를 입을 것, 쇠로 된 팔찌를 끼고 다닐 것, 칼을 휴대하고 다닐 것이라는 5가지 용모를 갖추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이슬람 통치에 맞서 저항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시크교 신자들은 인도에서 독립된 국사를 이루려고 노력했으나 시크 자치주를 건립되어 있는데 오늘날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다음으로 큰 종교이나 법적으로 독립된 종교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세계 주요 종교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생겨나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된 종교중 하나가 이란에서 출현한 바하이신앙은 이란 테헤란에서 출생한 미르자 후세인 알리 누리(1817~1892)에 의해 창시되었다. 바하이신앙에서 가장 중시히는 신념은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하나이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은 모두 같은 신이며, 모든 인류가 한 국가가 되어 하나의 신을 믿게 될 것으로 여기면서 바하이신앙의 추종자인 바하올라를 통해 그러한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강조하며, 양성평등 실현, 빈부격차 해소, 보편적 교육, 집단안보와 세계평화 등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연방 체제의 설립을 주장하고 있다.
3. 교재와 강의 12장을 공부하고 핵심내용을 서술합니다.
제12장 한국 종교의 이해
한국 종교는 세계의 종교로서 불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 속에 진입하면서 독특한 한국인의 정서와 접목되어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일으키며 토착화 즉 한국화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무속은 한국사회에서 종교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미신이나 사기라는 사회적 인식이 남아있다.
한국불교는 삼국시대에 유입되어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여러 종파가 있고 일본의 신종교인 한국SGI(창가학회)도 있다. 한국천주교는 18세기 말 남인계 유학자들의 서학 수용으로 시작되어 많은 순교자 출신의 성인을 배출하였으며, 개신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점진적 성장을 보였다. 한국개신교는 19세기 말 유입되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교회와 함께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여 한국 사회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특히 1960~19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 시기에 한국 경제와 더불어 고도의 성장을 하였지만, 1990년 이후 대형교회 세습과 같은 내부적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면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어 교세의 정체를 맞고 있다. 한국이슬람교는 1950년 한국전쟁에 이슬람교 국가인 터키가 참전하면서 도입되었다. 1976년에 서울 이태원에 최초로 이슬람교 사원이 건립되었다. 이후 전국에서 17곳에 이슬람센터가 설립되었다.
19세기 중엽 조선은 외세의 압력과 세도정치의 폐해, 지방수령들의 학정이 심하였고, 18세기 말에 들어온 천주교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을무렵 외세에 대응하고 위정척사파와 개화파가 각축을 벌일 때 경주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외치면 동학을 창도하였다. 최제우는 1864년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처형되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최시형은 동학의 도를 전파하고 교세의 확장과 동학의 만민평등 사상에 힘입어 1894년 지방관리들의 부패와 폭정에 항거하여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도통은 손병희에 전수되었고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교단을 쇄신하고 교육과 출판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천도교는 내 안에 한울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며 수심정기로써 수행하고 국가 사회적으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을 목표로 하며 시천주를 근간으로 삼고 사인여천의 윤리관을 지니고 있다. 원불교는 1916년 4월 28일 박중빈이 일원상의 진리를 대각하고 개교한 종교로 인권평등, 지식평등, 교육평등, 생활평등과 연관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인류 사회를 발전시켜 이상적인 평등 세계를 만들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증산교는 증산 강일순(1871~1909)을 신앙하는 교단의 통칭이다. 동학혁명 실패 후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자 이를 신명에 의한 도술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대종교는 한민족의 고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료로서 국조 단군을 교조로 섬기는 종교이다. 나칠(1863~1916)이 1909년 1월 15일 서울 재동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국교포명서”를 공포하며 단군교서로서 출발한다. 대종교의 제천의례는 한국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제천의례를 계승하되, 왕권 중심의 의례가 아니라 민중이 참여하는 제천의례로 복원하였다.